尹克榮 (1903년 9월 16일 ~ 1988년 11월 15일) [[파일:external/img.maniadb.com/107876.jpg]] [목차] == 소개 == [[한국]]의 아동문학가이자 동요작곡가 그리고 아동문화운동가. [[본관]]은 [[해평 윤씨|해평(海平)]]. 1903년 [[서울]] 태생이며 동요 '''반달'''의 작곡가로 잘 알려졌기 때문에 '''반달 할아버지'''라는 별명으로도 불렸다. 1921년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중퇴하고 [[일본]]으로 건너가 1923년 [[도쿄]]에서 색동회를 창립하였으며 [[일제강점기]] 중 희대적이게도 조선어 가사를 붙인 노래들을 작곡하여 어린이들에게 민족에 대한 자긍심을 심어주는데 힘썼으며 1926년 [[만주]]로 건너가 음악교사로 활동하여 어린이들에게 동요를 가르치게 되었다. 1945년 해방 이후 [[중국]]에 머물다가 용정에서 복역되었고 1947년 텐진에서 손수레를 이끌다가 [[대한민국|남한]]으로 탈출하여 동요 '''반달''', '''설날''', '''고드름''', '''따오기''', '''꾀꼬리''' 등을 작곡하고 동시에 아동문화운동에 힘쓰며 어린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전도사임을 표방하고 있었다가 1988년 11월 향년 85세로 사망하였다. 서울특별시에서는 [[강북구]] [[우이동]] 4.19 민주묘지 앞 삼거리 윤극영 가옥을 보존해 현재도 개방하고 있다. === 작품 === * [[반달(동요)|반달]] : 윤극영 작사·곡 * 설날 : 윤극영 작사·곡 * 고드름 : 유지영 작사·윤극영 작곡 * 따오기 : 한정동 작사·윤극영 작곡 * 꾀꼬리 * 기찻길옆 : [[윤석중]] 작사·윤극영 작곡 * 고기잡이 : 윤극영 작사·곡 * [[어린이날 노래]] : [[윤석중]] 작사·윤극영 작곡 * [[고명중학교]] 교가 : 전광용 작사·윤극영 작곡 * 서귀포초등학교 교가 : [[윤석중]] 작사·윤극영 작곡 === 우리나라 최초의 동요 '[[반달(동요)|반달]]' === 윤극영이 최초로 발표한 동요는 위에 나온 '달맞이'로 1924년 11월에 발표되었다. 그런데 왜 '반달'이 우리나라 최초의 동요가 되었나 하면, 1926년에 윤극영이 발표한 동요집 때문이다. 이 동요집의 제목이 '반달'이었고, 윤극영은 이 동요집에서 노래 '반달'을 '달맞이'보다 앞서 1924년 10월 12일에 만들었다고 적었다. 발표한 것은 2년 늦었지만, 만들기는 '달맞이'보다 먼저 만들었으니 '반달'이 최초의 동요가 된 것이다. 그리고 이 노래가 윤극영의 대표곡이 되면서, 윤극영이 얘기한 1924년 10월 12일이 우리나라 최초의 동요[* 정확히 말하자면 '최초의 창작동요'라 불러야 할 것인데, 엄밀한 의미에서 '최초'의 창작동요인가에 대해선 검토가 필요하다. 반달이 발표되기 이전인 1923년에 방정환 작사 정순철 작곡의 <형제별>이 발표되었고(번안곡이라는 논란이 있음), 윤극영이 작곡한 <고드름>과 <설날>이 반달보다 먼저 작곡되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.]인 '반달'이 발표된 날이 되었다. 그 뒤 동요 발달사를 연구하는 연구자나 동요 관련 행사를 주최하는 방송국이 모두 우리나라 동요의 시작을 1924년으로 잡게 된다. '달맞이'도 실제로 1924년에 발표한 곡이므로 우리나라 동요의 시작이 1924년인 게 틀린 건 아니다. 그런데, 1984년 5월 5일 KBS에서 방송한 '푸른하늘 은하수 60년'에서는 1924년 9월에 이미 반달을 작곡했다는 자막이 나온다. [[https://youtu.be/7oX9bJbih1I]] (0분 24초부터) 그리고 윤극영 본인도 이 방송에 직접 출연하여 반달을 작곡하기 한달여 전에 [[설날]]을 작사, 작곡하였다고 밝히기도 하였다. (13분 3초부터) == [[친일반민족행위자]] 논란 ==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[[홍난파]], [[안익태]], [[현제명]] 등 동종의 음악인들과 마찬가지로 과거 [[친일반민족행위자]]로 활동했던 사실이 알려져 논란의 대상에 오르기도 하였고 한때 [[친일인명사전]] 인명부에 등재대상에도 올랐다는 일설이 있었다.[* 실제로는 등재되지 않았다.] 친일 사유로는 [[일본 제국|일제]] 말기 때 만주에 일제가 수립한 괴뢰국 만주국에 적극 협력하였다는 사실이 알려져 논란의 대상으로 올랐다. 특히 홍난파나 안익태 등과는 달리 주로 어린이들을 위한 동요 작곡가로 잘 알려졌고 그의 노래들 대부분이 과거 [[국민학교]] 음악 교과서에도 수록된 사례도 있어서 논란의 대상에 오르기도 한 수준이었다. [[강원용]] 목사에 의하면 윤극영이 친일단체였던 '간도협화회'에 참여했고, 자신에게도 참여할 것을 강요했다고 증언했다. >그때 간도에는 간도협화회라는 친일 단체가 있었다. 한국인, 중국인, 일본인들을 서로 친화시킨다는 미명 아래 조직된 이 꼭두각시 단체는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 정책을 선전하고 고무하는 일을 맡아서 하고 있었다. 이 모임의 회장은 '푸른 하늘 은하수'로 시작하는 노래 '반달'의 작곡가요 아동문학가였던 윤극영이었다. (중략) >하루는 이 사람이 내게 좀 만나자는 전갈을 보내왔다. 협화회 사무실로 찾아갔더니 나보고 협화회 일에 참여하라는 것이었다. 처음에 그는 회유하듯 부드럽게 말했다. >"어차피 세상이 일본 중심으로 돌아가는 판인데 협력하여 같이 일하는 것이 현명한 길이 아니겠소?" >"나는 교회 일로 매우 바쁩니다. 그리고 곧 다시 일본에 공부하러 가야 하므로 그런 일을 할 만한 형편이 못될 것 같군요." >내가 여러가지 이유를 내세우며 거절의 뜻을 내비치자 이번에는 표정을 바꾸어 그가 말했다. >"그렇게 협력을 하지 않으면 신상에 별로 좋을 게 없을 텐데."[* 강원용, 역사의 언덕에서 1, 한길사, 143~144쪽] 유족 측에서는 윤극영의 친일행적 및 사실을 부인하는 것으로 알려졌고 지나치게 고인에 대한 폄하와 매도행위를 하지 말라고 주장하고 있다. 그러나 상세한 조사에 대해선 머뭇거리고 있기에 비아냥도 많이 받고 있다. [[분류:1903년 출생]] [[분류:1988년 사망]] [[분류:작곡가]] [[분류:서울특별시 출신 인물]] [[분류:해평 윤씨]] [[분류:경기고등학교 출신]]