[[분류:대한민국의 시인]][[분류:한국 남성 작가]][[분류:대한민국의 교육인]][[분류:거제시 출신 인물]][[분류:진주 류씨(토류)]][[분류:교통사고로 죽은 인물]][[분류:객사한 인물]][[분류:1908년 출생]][[분류:1967년 사망]][[분류:동래고등학교 출신]][[분류:모더니스트 작가]] ||||<tablealign=center>[[파일:external/www.poemlane.com/chung58.jpg]]|| ||<:> '''이름''' ||<(><colbgcolor=white,#2d2f34>'''유치환(柳致環)''' || ||<:> '''본관''' ||<(>[[진주 류씨]][* 토류계 대사성공파 26세 '''치(致)''' 해(海) 항렬.] || ||<|2><:> '''출생''' ||<(>[[1908년]] [[8월 10일]] || ||[[대한제국]] [[경상남도]] [[거제시|거제군]] [[둔덕면]] 방하리[* [[진주 류씨]] 집성촌이다.][[http://www.sisajournal.com/news/articleView.html?idxno=85786|#]] || ||<|2><:> '''사망''' ||<(>[[1967년]] [[2월 13일]] || ||[[대한민국]] [[부산직할시]] || ||<:> '''아호''' ||<(>청마(靑馬) || ||<:> '''학력''' ||<(>[[국방대학교]] {{{-2 (행정학사 / 3기)}}} || [목차] == 개요 == [[대한민국]]의 [[시인(문학)|시인]]이자 교육자. 극작가이자 [[친일반민족행위자]]인 동랑 [[유치진]]이 그의 친형이다. == 삶 == 유치환은 1908년 8월 10일 [[경상남도]] [[거제시|거제군]] 둔덕면 방하리에서 [[한의사]]였던 아버지 유준수(柳焌秀)와 어머니 [[밀양 박씨]] 박순석(朴珣碩)의 딸 사이의 5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2살 때 [[통영시|충무]]로 이주하여 유년기를 보냈다. 통영공립보통학교(현 통영초등학교) 4학년을 수료하고 일본 토요야마(豊山)중학교에 유학하였다. 1926년 귀국하여 [[동래고등학교|동래고등보통학교]]에 편입하여 졸업하였다. [[연세대학교|연희전문학교]]에 입학했다가 중퇴했고, 시를 쓰면서 한때 사진관을 경영하기도 했다. 1931년 '문예 월간'에 첫 시인 '정적'을 발표하면서 등단했고, 그 뒤 여러 직업을 전전하던 중 1937년(29세) 부산의 화신지사를 그만두고 통영으로 귀향했다. 통영에서 향교 재단이 운영하던 [[동원고등학교(경남)|통영협성상업학교]]의 교사가 되었다. 이 시절 유치환은 발행, 편집인이 되어 같은 해 7월 1일 부산 초량에서 동인지 『생리(生理)』를 창간하며 1939년 첫 번째 시집인 '청마시초'를 발간했다. 1940년 교사를 사임하고 [[만주]]로 피신했다가 해방 후 귀국하여 다시 교육계에 투신, [[통영시|충무]]/[[부산광역시|부산]]/[[경주시|경주]] 등 지방에서 [[국어교사]]로 근무하였으며[* 이 시기 제자였던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어디 경치 좋은 곳에 올라가 뒷짐을 지고 있다가 유치환 시인이 즉석에서 시를 짓기 시작해 그걸 받아 적는 일이 종종 있었다고 한다.] 훗날 경주고등학교장, 경주여자고등학교장, [[경남여자고등학교]]장[* 같은 시기에 이 학교의 교감을 지내고 있던 사람은 마에스트로 [[금난새]]의 부친이자 경남 지역에서 음악교사를 했던 작곡가 금수현 선생이다. 두 전설이 나란히 교장과 교감을 하고 있었던 셈.], 대구여자고등학교장, [[부산영상예술고등학교|부산남여자상업고등학교]]장까지 역임했다. [[만주]] 피난 활동과 교직활동 중, 그리고 [[6.25 전쟁]] 중에도 틈틈이 시를 쓰고 시집을 발표하며 출간한 활발한 문학인이었다. [[1946년]]에는 창립 조선청년문학가 회장을 지냈으며, [[1957년]]에는 초대 한국시인협회장을 지내는 등 [[대한민국]] 문학사에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하는 인물이다. 특히 '''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'''으로 시작하는 [[교과서]]에 정말 자주 등장하는 작품인 ''''[[깃발#s=7]]''''과 ''''생명의 서'''', ''''[[행복]]'''' 등이 유명하며 [[수능]] 필수 암기 리스트에 들어가 있기도 하다. 통영여중 재직 당시 가정교사로 근무했던 시인 정운 [[이영도(시인)|이영도]](1916년 10월 22일 ~ 1976년 3월 5일)에게 그야말로 한 눈에 반해 살아 생전 20년 동안 연애편지를 써서 보냈다. 처음 만나게 된 1947년부터 [[교통사고]]로 죽게 된 1967년까지 이룰 수 없는 [[짝사랑]]에 대한 고통과 회한, 그리고 설렘과 기쁨을 잔뜩 버무려 표현한 연애편지들 가운데 [[6.25 전쟁]] 이전의 것은 소실되고 남아 있던 것이 5,000여통이라 한다. 그 중 200통을 추려 유치환이 죽고 나서 두 달 후에 《사랑했으므로 幸福하였네라》(중앙출판공사, 1967) 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되었는데, 당시로서는 기록적인 부수인 25,000부를 찍어냈다. 문제는 그가 처자식이 있는 유부남이었다는 점. 반면 이영도는 21세에 남편을 잃고 외동딸을 홀로 키우고 있던 과부였다. 다만, 두 사람은 현실의 만남을 갖지 않았다고 한다. 그러니까 유치환 아내는 이 이야기가 퍼졌는데도, 20년동안 꾹 참았다는 것이다. 참고로 이영도는 위에 나온 책 판매수익을 모두 기부했다. [[거제시]]에 청마기념관과 청마거리가 있고 [[통영시]]에 청마문학관이 있으며[* [[거제시]]와 [[통영시]]가 청마의 출생지 인정 여부를 놓고 법정싸움까지 벌이기도 했으며, 이 때문에 통영의 청마문학관에서는 문학답사 온 대학생들에게 거제의 청마기념관을 '''가짜'''라고 공격하기도 했다.], [[부산광역시]] [[동구(부산)|동구]]에는 '유치환 우체통'이라고 불리는 문화공간이 있을 정도로 고향에서는 확실히 스타 작가 대접을 받는 분.--실제로도 그런 분이긴 하다-- 부산남여자상업고등학교(현 [[부산영상예술고등학교]])장으로 재직하던 중 1967년 2월 13일에 야근을 마치고 귀가하다가 [[부산시]][* 당시 부산시는 직할시로 승격되어 있었지만 그렇다고 '부산직할시'로 불린 것도 아니었다. [[경상남도]]에서 분리되어 정부 직할이 되었을 뿐이었기 때문에 1963년부터 1981년까지의 이 과도기는 정확하게 표기하자면 '(정부 직할) 부산시'라고 하는 것이 맞다. ('정부 직할'은 생략 가능하므로 괄호 표기를 한 것이다.) 부산직할시로 개칭(동년 7월 1일에 직할시로 '승격'된 [[인천시]], [[대구시]]와 달리 부산은 이미 직할시였으므로 '개칭'이 맞다.)된 공식 일자는 1981년 4월 4일이다. 그러나 현재 [[부산광역시]]에서는, 그 과도기 당시에도 '부산직할시'라는 표현이 언론 등에서 비공식적으로 쓰였던 바가 있었던 점을 근거로 '부산직할시'의 역사를 1981년이 아닌 1963년부터로 잡고 있다. 실제로 [[부산교통공사]]의 전신인 부산직할시지하철건설본부도 1981년 1월 1일에 출범하였는데 당시는 (정부 직할) 부산시였다. 즉 '부산직할시'가 아니였음에도 불구하고 해당 명칭을 썼다는 사실을 통하여, 부산시에서 이미 그 과도기에도 계속 부산직할시 명칭을 써왔으며 정부에서도 당시에 개칭 계획을 염두에 두고 부산직할시 명칭을 허가해주었을 것임을 추정할 수 있다.] [[동구(부산)|동구]] [[수정동(부산)|수정동]]에서 시내버스에 치였고, 병원으로 후송되던 도중 끝내 숨지고 말았다. 묘소는 [[부산광역시]] [[사하구]] [[에덴공원]]에 있었으며 이 까닭에 에덴공원에 청마 시비가 있기도 하나, 현재는 유씨 집성촌이 있는 [[거제시]] 둔덕면 방하리로 이장하였다. 단독 묘역이 아니라 유씨 공동묘지 같은 곳이라 잘 공개되지 않지만, 가끔 열리는 때 들어가 보면 그의 묘소 옆 멀지 않은 곳에 모친의 묘소가 있어, 그가 어머님을 위해 쓴 사모비도 읽을 수 있다. 문제가 있다면 [[친일파]] 의혹이 끊임없이 제기된다는 것. 특히 1942년 2월 6일 자 만선일보에 기고한 친일성 산문이 2007년 10월 19일 [[경남대학교]] [[국어국문학과]] 박태일 교수에 의해 발견되면서 기존의 애국 시인 이미지가 많이 퇴색되었다. 그나마 형 [[유치진]]이 백범 [[김구]] 주석으로부터 공개 비판을 받을 정도로 저명한(?) 친일파인 탓에 본인은 상대적으로 묻히는 편. 정상 참작의 여지조차 없는 친일파인 [[유치진|형]]과 달리 그는 매우 전형적인, 친일과 애국적 행보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변절자 혹은 나약한 지식인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객관적일 것이다. 잘한 것도, 옹호할 가치도 없지만 당시에는 '''조선 문학'''을 한다는 행위만으로도 목숨을 건 일이었음을 감안해야 하며, 그럼에도 현대와는 다르게 당대의 몇 안되는 지식인으로서 떳떳치 못한 행위를 했다는 것 역시 생각해야 한다. [[ 2019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]]에 '출생기'가 출제되었다 == 작품 == * [[깃발#s-7]] * [[생명의 서]] * [[행복#s-5.2]] * [[바위#s-2]] * [[낙화#s-2.1.3]]