[include(틀:사기)] [include(틀:한서)] || '''[[작위]]''' |||| 중산왕(中山王) || || '''[[시호]]''' |||| 정(靖) || ||<tablealign=center> '''[[성씨]]''' |||| 유(劉) || || '''[[휘]]''' |||| 승(勝) || || '''아버지''' |||| [[경제(전한)|전한 경제]] || || '''생몰기간''' || 음력 || ? ~ 기원전 113년 || || '''재직기간''' || 음력 || 기원전 154년 ~ 기원전 113년 || [목차] [clearfix] == 개요 == [[경제(전한)|한경제]]와 가부인의 둘째 아들이자, [[전한]]의 [[제후국]] [[중산국]]의 첫 왕[* 중산국은 원래 조나라의 지군인 상산군의 일부였는데, [[오초7국의 난]] 직전에 상산군을 조나라에서 회수하고, 난 직후에는 상산군을 분할해 새로 왕국으로 세우고 유승에게 준 것이다.]이다. == 생애 == [[무제(전한)|한무제]] 시절, [[조조(전한)|조조]][* [[삼국지]]의 [[조조]]와는 동명 이인이다.]의 정책에 따라 [[유비(전한)#s-1|유비]][* 이 사람의 후손인 [[삼국지]]의 [[유비]]와는 동명이인이다. --어쩜 이렇게 딱 들어맞냐?--]가 반발하여 발생했던 [[오초7국의 난]] 이후 경제의 뒤를 이은 [[무제(전한)|한무제]]는 제후왕의 죄를 들추어내어 탄압하는 정책을 펴고 있었는데 한무제가 즉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황제가 제후왕들을 불러 연회를 열였다고 한다. 이때 중산정왕은 그 자리에서 울었고, 무제가 그 이유를 묻자 이 기회를 이용하여 제후왕에 대한 적극적인 탄압 정책을 중단해 줄 것을 요청했다. 무제는 중산왕의 의견을 받아들여 제후에 대한 예를 후하게 했고, 제후왕의 일을 상주하는 일은 줄어들었다. 그러나 시대의 흐름은 [[군현제]]로 가고 있었고, 무제는 왕의 세자뿐만이 아니라 다른 아들들에게도 [[제후국|봉국]]을 나누어주게 하는 [[추은령]]을 만들어서 제후왕을 약화하는 기조를 계속 이어나갔다. 43년 동안 중산왕의 지위에 있으면서 매우 놀기 좋아하고 여색을 밝혀서[* 한무제는 강력한 경쟁자이며 제위 계승의 라이벌로 지목되던 이복형 중산정왕 유승을 계속 의심하였는데, 유승이 이 의심을 피하고자 일부러 주색에 탐닉하는 모습을 보여 한무제의 칼날을 피해갔다는 설도 있다. 다만 여색을 밝히기도 하였으나 전형적인 탐관오리는 아니고 상당히 머리가 좋았던 것 같다. 제후왕의 일화나 한무제가 다른 형들도 아닌 바로 위의 형인 유승을 견제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말이다.] 자손이 합쳐서 120여명이 넘었다고 한다. 친형 조경숙왕 유팽조는 원래 관리들이 해야 할 일을 빼앗아 직접 자기 봉국을 다스리고 있어서 팽팽 노는 자신과는 양 극단에 있었는데, 그래서 서로 까고 다녔다. 그런데 둘 다 여색 밝히는 건 비슷해서 아들이 징그럽게 많다. 봉토를 받은 아들만 유팽조는 26명이고 유승은 21명이고, 추은령에도 불구하고 모든 왕자가 봉토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[* 예를 들면, 하간혜왕 유량은 하간효왕 유원의 아들이나 왕이 되기 전에는 작위가 없이 상군고령이라는 작은 관직을 지내고 있었다.] 기록에 남지 않은 아들이 더 있을 수 있다. 이렇게 보면 그냥 한나라 시기의 평범한 황족으로 보이지만 '''[[촉한]] [[유비|소열제 유비]]의 조상이 바로 이 사람이라''' [[삼국지]] 덕후들이라면 한 번 쯤 들어봤을 이름이기도 하다. 삼국지 관련 창작물에서 '중산정왕 유승의 후손 유비'라는 꼬리표가 항상 붙어다니는 덕에.... 다만 유비는 적자인 중산애왕 유창의 후손이 아니고 서자인 5남 육성정후 [[유정]]의 후손이었고, 유정은 종실 제후들의 힘을 약화시키려는 무제가 황실 제사에 쓸 금을 적게 바쳤다는 핑계로 작위를 박탈해서 이후 호족으로 사는 등 그다지 밝은 인물이 아니었던 것이 흠이다. == 기타 == 1968년 그의 무덤이 [[허베이성]] 만성현에서 발굴되었는데, 기록으로만 남아있던 '''금루옥의'''(金縷玉衣)[* 옥 조각을 금실을 이용해 엮어 만든 일종의 [[수의]], 후한서 예의지의 기록에 따르면 신분에 따라 사용하는 실의 종류를 금-은-동으로 구분하였으며 금실은 오직 황족만이 쓸 수 있었다.] 등 많은 부장품들이 쏟아져 나왔다. 금루옥의를 사용하면 유해가 부패하지 않는다는 믿음이 전해내려 왔으나 막상 발굴했을 때는 뼛조각 몇 개만 남아 있었다. 참고로 그의 무덤은 중국 인민해방군이 참호공사를 하던 중 발견이 되었는데, 하필이면 그 시기가 [[문화대혁명]]의 광기가 온 중국 대륙에 휘몰아치던 시기인지라 [[홍위병]]에 의해 파손될 뻔 한 것을 [[저우언라이]]가 비밀리에 학자들을 초청해 발굴작업을 하였고, 그의 무덤은 전혀 도굴되지 않았기에 어마무시한 양의 유물들이 나와 모두가 깜짝 놀랐다고 한다. 이렇게 극적으로 보존된 그의 무덤과 부장품들은 한나라 시기 황족들의 무덤을 연구하는데 큰 자산이 되고 있다. 그리고 후손이 중국에서 유명한 한소열제 유비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그의 무덤은 그 지역을 대표하는 관광지가 되었다. 유승 입장에서는 생전에 아버지를 잘 만나 일생을 편히 살았고 게다가 사후에도 후손을 잘둬 영광까지 얻었다. 그야말로 성공한 인생. 그런데 학자들이나 삼국지 덕후들이 더 놀라는데, 그 이유는 유승의 묘가 있는 지역은 후한~삼국 당시 [[기주]] 지역으로 당시 [[조조]]와 [[조비]]의 위나라가 지배하던 지역인데 도굴에 환장하는 [[조조]]와 [[위(삼국시대)|위나라]]가 필생의 라이벌이자 그토록 증오하는 [[유비]]의 조상인 유승의 무덤을 건드리지 않았다는 것.[* 다만 잘 몰랐을 수도 있다. 이미 죽은 지 수백년이 지났고 그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. 2천여년 동안 도굴당하지 않은 것으로 보면 존재가 잊혀졌기 때문이라 보는 게 옳을 듯하다.] [[파일:external/collection.sinaimg.cn/U5566P1081T2D117994F6DT20130802174904.jpg]] 유승의 금루옥의 == 둘러보기 == ||||||||||||<:><tablealign=center><#008000> '''[[전한|{{{#ffffff 중산국의 역대 국왕}}}]]''' || ||<width=30%> 신규 책봉 || {{{+1 ←}}} ||<width=30%> '''1대 정왕 유승''' || {{{+1 →}}} ||<width=30%> 2대 애왕 유창 || [각주] [include(틀:문서 가져옴,title=유승,version=32)] [[분류:생년 미상]][[분류:기원전 113년 사망]][[분류:한나라의 황족]]