[include(틀:역대 로마 황제)] [[파일:IMG_2253.jpg]] ||<tablealign=right> '''제호''' ||유스티누스 1세(Justin Ⅰ)[br]Flavius Iustinus Augustus(라틴어)[br] Ἰουστίνος(그리스어) || || '''휘''' ||플라비우스 유스티누스[br](Flavius Iustinus)|| || '''생몰 년도''' ||[[450년]] [[2월 2일]] ~ [[527년]] [[8월 1일]]|| || '''재위 기간''' ||[[518년]] 7월 ~ 527년 8월 1일|| [목차] == 개요 == [[동로마 제국]]의 황제. [[트라키아]] 지방 출신의 병사로 시작하여 근위대장, 더 나아가 황제의 자리까지 오른 대표적인 자수성가형 인물. 다만 문맹이었고 정치력이 부족하여 조카 [[유스티니아누스 1세]]에 의존하여 통치하였다. == 생애 == === 황제 즉위 이전 === 450년에 현재 [[북마케도니아]]의 수도인 [[스코페]]에서 태어났고 트라키아식 이름인 이스토크로 불린 유스티누스는 10대 시절 [[고트족]]의 침공을 피해 [[콘스탄티노플]]로 피난을 떠났다. 전란의 와중에 누더기 옷과 빵 한 덩이 외의 재산을 챙겨오지 못한 그는 입대를 선택했고, 이것이 청년 유스티누스의 운명을 바꾸게 되었다. 군대에 쉽게 적응한 유스티누스는 아나스타시우스 1세 시절에 장군을 거쳐 늙은 황제가 사망할 무렵에는 코메스 엑스쿠비토룸, 즉 근위대장에 까지 이르렀다. === 즉위와 교회 통합 === 칠칠맞은 조카들 중에서 후계자를 정하지 못한 아나스타시우스 1세는 근위대장 유스티누스를 지목했고[* 다음날 아침 자신의 침실에 처음으로 들어오는 사람에게 제위를 물려주기로 했는데, 유스티누스가 바로 그 사람이었다. (존 줄리어스 노리치, 비잔티움 연대기 1권)] 얼마 후 자연사하였다.[* 당시 88세 !] 유스티누스는 [[포퓰리즘|시민들에게 돈을 뿌리며 환심을 샀고]], 518년에 시민의 환호 속에 즉위하였다. [[직업군인|평생을 --군바리로-- 병영에서 생활한]] 그는 학식이 부족하였고, 문맹에 가까웠다. 이에 그는 고등교육을 받은 자신의 조카 플라비우스 페트루스 사바티우스[* 누이의 아들, 즉 외조카라 성이 달랐다.]를 수도로 소환하였고, '''[[유스티니아누스]]'''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. 이 결정이 동로마 제국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칠지 당대 사람들은 인지하지 못했을 것이다. 519년, 유스티니아누스의 주도로 동로마 사절이 [[로마]] [[교황청]]에 파견되었고, 교황이 교회의 수장이며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여 레오 1세부터 끌어온 동서 교회의 대립인 아카키우스 대립이 종결되었다. 525년에는 조카가 서커스단 출신의 여자인 [[테오도라]]와의 결혼식을 합법화 하기 위해 고위 관리가 하층민 출신 여자와의 결혼을 금하는 법을 폐기하였다. 그리고 그 해에 [[킬리키아]] 지방의 도시인 아나자르부스[* 현재 [[터키]]의 도시인 [[아다나]] ]가 황제의 이름을 따서 유스티노폴리스라고 명명되었다. === 죽음 === 526년, [[시리아]]에 지진이 발생하여 [[안티오크]]가 파괴되었다. 복구 사업을 지시하던 황제는 건강이 악화됨을 느꼈고 조카 [[유스티니아누스]]를 후계자로 결정한 후 527년 4월에 자연사 하였다. == 여담 == [[파일:Justin-I.jpg|width=40%]] 무일푼의 피난민 출신에서 시작하여 근위대장을 역임한 후, 황제까지 오른 자수성가형 인물이지만, [[유스티니아누스 대제|조카]]의 후광에 의해 묻히는 인물이다. 심지어 그가 유스티니아누스 왕조의 창시자라는 사실도 웬만한 서양사 애호가가 아닌 이상 비전공자들은 알지 못한다. == 참고자료 == * 워렌 트레드골드 : <비잔틴 제국의 역사> * 게오르크 오스트로고르스키 : <비잔티움 제국사> * 존 줄리어스 노리치 : <비잔티움 연대기> [[분류:동로마 황제]]