[include(틀:역대 대한제국 내부대신)] ||<tablewidth=100%><tablebordercolor=#191919><tablealign=center><tablebgcolor=#191919> '''{{{+1 [[일제강점기|{{{#fff 일제강점기}}}]] [[조선귀족|{{{#fff 조선귀족}}}]]}}}''' || || {{{#!wiki style="margin: -0px -10px" {{{#fede58 {{{#!wiki style="margin: -6px -1px" {{{#555555,#aaaaaa ||<tablewidth=100%><bgcolor=#fff,#222><width=20%> '''[[남작|{{{#191919,#e5e5e5 남작}}}]]'''[br]--유길준-- || || {{{-1 작위 수작 거부}}} ||}}}}}}}}}}}} || ||<-2><tablealign=right><tablewidth=450><tablebordercolor=#191919><bgcolor=#dcdcdc> {{{#191919 '''{{{+1 유길준}}}[br]兪吉濬 | Yu Kil-chun'''}}} || ||<-2> 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attachment/oldryu.jpg|width=100%]]}}} || ||<colbgcolor=#191919><colcolor=#FFF> '''이름''' ||<colbgcolor=#FFF,#1f2023><(> 유길준 ,,(兪吉濬),, || || '''본관''' ||<(> [[기계 유씨]] ,,(杞溪),, || || '''자''' ||<(> 성무 ,,(聖武 / 盛武),, || || '''호''' ||<(> 구당 (矩堂), 천민 (天民)[br]구일 (矩一) || ||<|2> '''출생''' ||<(> [[1856년]] ([[철종(조선)|철종]] 7년) [[11월 21일]] ([[음력]] [[10월 24일]]) || ||<(> [[한성부]] 북촌 계동[br](현 [[서울특별시]]) || ||<|3> '''사망''' ||<(> [[1914년]] [[9월 30일]] (향년 57세) || ||<(> [[경성부]] (현 서울특별시) || ||<(> 신장염과 [[과로]] 등의 합병증으로 인한 [[병사]] || || '''직업''' ||<(> [[관료]], [[외교관]], [[작가]] || || '''학력''' ||<(> [[게이오기주쿠대학]] 중퇴[br]더 거버넌스 아카데미 졸업[br][[보스턴 대학교]] 중퇴 || || '''종교''' ||<(> [[유교]] (성리학) || || '''국적''' ||<(> {{{-1 [[파일:조선 어기.svg|width=25]] [[조선]][br]→ [[파일:대한제국 국기.svg|width=25]] [[대한제국]][br]→ [[일본 제국|[[파일:일본 제국 국기.svg|width=25]]]] [[일제강점기]] 조선}}} || || '''주요 경력''' ||<(>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주사[br]내무협판[br]한성부민회 회장[br][[내무부|내무부대신]] || [목차] [clearfix] == 개요 == [[개화기]] [[조선]]의 [[정치가]]. 본관은 [[기계 유씨|기계]], 호는 구당(矩堂), [[서울특별시]] 출신이다. [[갑오개혁]]의 중심이 된 [[개화파]]인 동시에 [[명성황후]]를 시해한 [[을미사변]]의 주동자로 추정되는 인물이다. 원래는 [[일본 제국|일제]]에 호의적이었지만 일제가 조선을 집어삼키려 하자 [[을사조약]]과 [[경술국치|한일 합방 조약]]을 반대했고 일제의 [[남작]] [[작위]]도 거절해 [[박영효]] 등처럼 [[이름]]을 더럽히지는 않았다.[* 그가 사망한 1914년이면 경술국치(1910년) 이후이기는 하지만 [[고종(대한제국)|고종]]보다 빨리 죽은 것(1919년)이라서 [[친일]]로 전향하는 속도가 빠르지 않았을 뿐이라는 주장도 있기는 하다. 유길준을 비판한 [[윤치호]]도 이 시기까지는 친일 행보를 보이지 않았다.] 그래서 평가가 더 갈리는 인물. == 생애 == ||<tablealign=right><table width=400><width=51%> 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attachment/youngryu.jpg|width=100%]][br]유학 시기의 모습}}} || 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구당 유길준.jpg|width=100%]][br]말년의 모습}}} || 15세부터 [[박규수]] 문하에서 [[김옥균]], [[박영효]], [[김윤식(조선)|김윤식]] 등과 함께 공부했다. 1881년 [[어윤중]]의 수행원으로 '조사 시찰단'(신사 유람단)에 참가해 근대 시기 '최초의 조선인 [[일본]] [[유학생]]'이 되어 일본의 유명한 [[문명]] 개화론자 [[후쿠자와 유키치]]가 세운 [[게이오기주쿠대학|게이오 의숙]]에서 공부하였다. 이후 [[임오군란]]이 일어나자 학업을 접고 1883년 귀국해서 박영효와 함께 [[한성순보]]를 발간하다가 [[서양]] 사절단인 [[보빙사]]의 일원으로 [[민영익]], [[홍영식]], [[서광범]] 등과 함께 [[미국]]으로 파견되었다. 이때 유길준은 보빙사 임무가 끝난 뒤에도 미국에 남아 [[매사추세츠]] 주의 거버너스아카데미에서 유학길을 밟아 '최초의 조선인 미국 유학생'이 되었다. 조선 정부가 출발할 때부터 [[합법]]적으로 인정한 케이스는 아니고 보빙사 수장이던 민영익의 허가 아래 국비 유학생으로 그냥 눌러앉았다. 유길준은 최초 의 유학생이기는 했지만 2년여 만에 귀국해 [[졸업]]은 하지 못했다. '최초의 조선인 미국 [[대학]] 졸업생'은 1891년 학사 [[학위]]를 취득한 같은 보빙사 [[수원시|수원]] 출신이던 변수.[* 미국 [[연방]] [[공무원]](농무성)으로 있다가 학위를 받은 1891년 [[열차]] 사고로 [[사망]]해 더이상 전하는 이야기가 없다.] 보빙사 일행은 조선인 최초로 [[전기]]를 경험하였는데 유길준은 이때 "[[인간]]이 아니라 [[마귀]]의 힘으로 전기가 켜진다"고 생각했다고 한다. [[엘리베이터]]도 처음 타 본 장본인이었는데 당시에는 엘리베이터 문이 [[감옥]]처럼 철문으로 되어 있다보니 유길준은 자기를 가두는 줄 착각했다는 [[에피소드]]도 있다. 미국에서 제대로 [[컬쳐쇼크]]를 받게 된 유길준은 이후 개화론을 강력히 주장하게 된다. 그러나 낯선 땅에 [[이방인]] 홀로 있으니 후원에도 불구하고 생활고나 냉대 등 이래저래 고생은 좀 한 것으로 보이고 그러다 [[갑신정변]]이 일어나자 학업을 중단하고 미국을 떠나 [[대서양]]을 건너 1년간 [[유럽]] 각국을 돌아다니다 1885년 12월 조선으로 돌아오게 된다. 그러나 김옥균 등 갑신정변 주동자들과의 친분 탓에 [[체포]]되어[* 조선 이전에 일본에 들러서 김옥균을 만나 '자신은 뭐가 됐든간에 고국으로 돌아가야겠다'고 말한 후 귀국했다. 다만 이때가 이미 유럽을 1년 정도 [[여행]]하다 왔을 때라는게 포인트. 그렇게 시간을 보내면서 조선 사정을 [[염탐]]한 것이 자신의 안위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.] 죽을 뻔한 것을 [[한규설]] 등의 도움으로 겨우 모면하고[* 정치적 사건으로 받은 [[판결]]은 아무래도 [[형량]]이 상황에 따라 들쭉날쭉한 경우가 많을 수 밖에 없기는 하다. 운빨이 미친다는 것.) 유길준이 그랬고 후일의 [[이승만]]도 그랬다. 유길준은 [[석방]], 이승만은 [[도서관]] 차려놓고 [[선교사]] 불러다가 공부했던 범털. 다만 당장 사건이 벌어진 직후라면 얄짤없는 경우가 많을 수 밖에 없는데 대표적인 케이스가 갑신정변 실패 후 고종을 [[호위]]하다 [[살해]]당한 홍영식이다.] 한규설의 식객으로 수년간을 [[연금]] 상태로 지내게 된다. 이때 유길준은 후쿠자와 유키치의 '서양사정'처럼 서구권 정보에 대한 [[서유견문]] 같은 책들을 1885년부터 집필해 모아놨다가 10년 후인 [[을미개혁]] 때 [[출판]]하게 된다. 1885년에서 1887년까지 이어진 [[영국]]의 [[거문도 점령 사건]] 당시에는 '조선 중립화론'도 조심스레 발표해보지만 큰 반향없이 무시당했다.[* [[강대국]] 사이에 끼어있는 지리적 요충지면서 상대적 [[약소국]]인 [[벨기에]]나 [[스위스]]처럼 조선도 요충지이기 때문에 잘 대처한다면 그들처럼 영구적인 [[중립국]]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. 하지만 이 시기의 유길준은 아무런 정치적 영향력이 없었다. 무엇보다도 다른 열강들이 조선을 중립국으로 놔둘 생각이 별로 없었고, 이는 그때나 지금이나 한반도의 우울한 지정학적 숙명으로 남아있다..] 갑오개혁이 시작되던 1894년 비로소 [[김홍집]] [[내각]]에 참여하여 [[내무부]]를 맡으며 갑오개혁의 이론적 기초를 담당하는 등 개혁파의 큰 손으로 활동하였다. 1895년 친일 성향이 강했던 을미개혁 때는 대대적인 반발에도 불구하고 [[단발령]]을 밀어붙였다가[* 유길준은 짧은 [[머리]]가 편하고 [[위생]]적이라고 생각했다. 문제는 지금 와서 보면 당연한 것도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. 유길준의 저서 등을 보면 갑신정변 등을 겪으며 일종의 '우민 경멸론' 비슷한 생각도 가지게 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[[민중]]을 [[계몽]]보다는 [[개조]]시키려는 생각이 강했을지도 모른다. 좋은 취지의 [[정책]]도 어떻게 공감을 얻고 과정을 만들어가느냐가 중요한 사례 중 하나라고 볼 수도 있겠다.] 수많은 유림들이 유길준을 비토하게 만든다. 1896년 [[아관파천]]이 일어나고 고종에 의해 [[명성황후]]를 시해한 을미사변의 을미사적([[김홍집]][* 최후가 꽤나 비장하다.], 유길준, [[정병하]], [[조희연(1875)|조희연]])으로 지목되어 [[목숨]]이 위태로워지자 일본으로 [[망명]]하게 된다. 다만 을미사변 당시 유길준이 협력했다는 것은 윤치호의 기록에 근거한 것으로 [[심증]] 수준이지만 여러 정황상 유길준이 의심받는 것 또한 사실. 유길준 본인은 [[흥선 대원군]]이 을미사변을 꾸민 것으로 [[편지]] 등을 통해 증언하고 있는데 지금도 여러 의견이 갈리는 부분. 1902년 일본 유학생 중 게이오의숙을 거쳐 일본육사 11기생으로 입교한 일본 [[육사]] 출신의 '일심회(一心會)'와 연결해 [[의친왕]]을 왕으로 [[옹립]]하려는 [[쿠데타]]를[* 이른바 일심회 사건. 당시 [[의친왕]]은 미국 로어노크 대학에 유학중이었기 때문에 이들의 모의와는 무관했다.] 기도하기도 했으나 실패하였으며 다른 조선인 유학생들은 다 [[끔살]]되었다. 이 일은 국제 분쟁으로 비화되어 유길준은 일본에서도 [[오지(지리)|오지]] 중의 오지인 [[오가사와라]] 섬에 4년간 [[유배]]를 당한다. 1907년 고종 [[폐위]] 후에는 귀국해 [[흥사단]] 부단장, '한성부민회' [[회장]]을 역임하였다. 귀국 이후에도 '[[근대화]]의 [[스승]]'이라며 일제에 호의적인 입장은 버리지 않았다. 그런데 보통 이런 [[테크]]를 탄 경우에는 대부분 을사조약 이후에는 소극적이건 적극적이건 친일로 전향해서 '대일본 제국 반자이'를 외치기 마련이다. 유길준은 의외로 [[일진회]]의 '한일 합방론'을 정면으로 반대하였으며 1905년 11월 [[을사조약|을사 보호 조약]]이 체결되자 일본이 조선을 병합할 것을 예상하고 이를 반대하였다. [[경술국치|국권 상실]] 후에는 일제의 남작 작위도 거부한다. 그러나 이와는 다르게 [[이토 히로부미]]의 [[암살]] 직후 '[[민간인]] 사죄단'을 이끌기도 하고 '[[친일파]] 99인'에 따르면 본인도 작위는 거절했으나 [[고종(대한제국)|고종]]과 [[순종(대한제국)|순종]] [[황제]]의 권유라면서 은사금 일부는 낼름받았다고도 한다. 그리고 조선으로 귀국한 이후 '[[강화도 조약|병자 수호 조교]] 이후로 일본은 꾸준히 조선의 [[독립국]] 직위를 유지시키려 하였지만 조선이 잘못해서 [[보호국]]이 된 것'이라며 을사조약을 두둔하는듯한 주장을 하기도 했다. 어쩌면 망해가는 조선에 대한 자조섞인 [[디스]]였을지도 모른다. 1914년 향년 59세로 [[사망]]했다. 유길준의 가족들은 대부분 친일파였는데 동생 유성준과 첫째 아들 유만겸은 [[중추원]] 참의직을 지낸 거물급 친일파에 속하고 둘째 아들 [[유억겸]]은 그래도 '합법적 공간'에서 [[신간회]] 등의 [[독립운동]]을 했었지만 1938년 '흥업 구락부 사건'을 전후해 친일파로 [[변절]]했다. 하지만 유억겸은 [[광복]] 후 연희대학교(오늘날 [[연세대학교]]) 총장, [[문교부]](오늘날 [[교육부]]) 장관 등을 역임하여 그런 사실들은 덜 알려진 편이다. == 사상과 저서 == 유길준의 [[사상]] 중 하나로는 조선의 실정에 맞춘 개화를 해야 한다는 일명 '실상개화(實狀開化)'가 있다. 기존의 상고주의 사관에 반대해 문명은 미개화 - 반개화 - 개화의 단계를 거쳐 꾸준히 [[진보]]한다는 '문명 진보 사관'을 제시하였다. [[서재필]]과 마찬가지로 미국에서 본 것이 인상적이었던지 '군민공치'를 주장하면서 상공업 진흥, 근대적 조세와 [[화폐]], 근대 [[교육]]에 앞장섰다. 다만 [[입헌군주국]]을 주장하면서도 [[군주]]권의 존재에 대한 생각은 변함이 없었기 때문에 유길준에 대한 평가는 보수적 근왕주의 개혁가에서 급진적 사회 변혁가까지 널을 뛰는 편이다. 이런 평가는 서유견문에서부터 시작되었고 죽을 때까지 이어졌다. 사실 이런 [[모순]]성이야말로 당시 개화파 [[지식인]]들의 시대적 특징이자 현실적 한계였다고 볼 수도 있다. 속내야 어찌됐든 밖으로는 입 1번 잘못 놀렸다가는 목숨이 날아갈 수도 있는 판국이니 말이다. [[파일:attachment/studyryu.jpg|width=30%]] > 노동야학회 고문 유길준 씨 고문의 말씀: "여보(이보시오), 나라 위하여 일하오. 또, 사람은 배워야 합니다." > 노동자의 대답: "네. 고맙소. 그리하리다" 본인이 쓴 '노동야학독본'의 한 장면이다. 유길준의 저서로는 서유견문, 구당시초, 대한문전, 노동야학독본, 조선문전 등이 있다. 이 중에서 서유견문은 최초의 [[한글]] 조사를 사용한 국한문 혼용 도서로만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단순한 서구 여행기가 아니라 서구의 근대 모습을 보고 우리 체질에 맞는 근대화 방안을 [[정치]], [[경제]], [[법률]], [[교육]], [[문화]] 등 다방면에서 구체적으로 제시한 방략서로 지금 봐도 배울 점이 있을 수 있는 양서이다. 다만 지나치게 서양에 경도되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.[* 이 점에서 유길준의 사상은 일반적인 [[사회진화론]]과 차이를 찾아보기 어렵다. 그의 대표작인 서유견문도 이런 측면이 가장 강하다는 것을 부정하기 어렵다. 심지어 [[프랑스 혁명]] 당시의 민중들까지도 우매하다고 멸시하는 내용이 있다.] 허나 알고보면 유길준이 온전한 서구주의자는 아니었는데 상인의 대도에서도 개화의 [[등급]]을 논하면서 개화가 온전한 나라는 지금까지 없었다고 언급했다. 그리고 개화는 실상과 허상으로 구분되며 개화는 자신의 처지를 잘 헤아려 행해야 한다고 했다. 개화는 남의 것을 취하는 것만이 아니라 자신의 아름다운 것을 보전하는 것이며 무조건 서양의 것이라고 행하는 것은 개화의 변질, 왜곡이라고 비판했다. 내용 외적으로 보면 이 책을 통한 [[저자]]의 목적 또한 비판의 대상이 된다. 일단 책이 나온 다음 고종에게 바쳐서 정책화를 시도했지만 당연히 실패.[* 갑신정변에 연루되었던 인간을 간신히 처벌 안하는 수준에서 넘어갔더니 다시 정책 제안하겠다고 글을 올린 것이다. 이건 내용이 좋으냐 나쁘냐를 떠나서 당시 정국상 받아줄 수가 없다.] 이후 조선에서는 [[금서]]가 되었고 일본에서 찍었는데 그 책들도 판매용이나 배포용은 아니고 갑오개혁과 갑신정변에 대한 자신의 정책 [[홍보]]용으로 사용되었다. 일본에서 출판되었다는 점을 봐도 알 수 있지만 기존 종속 체제인 [[청나라]]에 대한 [[사대]]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비판하지만 서양과 일본의 [[제국주의]] [[시스템]]에 대해서는 입을 닫아서 이후 영향을 받은 갑오개혁에서 [[독립협회]]로 이어지는 초기 개화파들의 방향성을 그대로 규정해버렸다. 유길준이 항상 입던 검은 정복과 유길준의 작위 [[사퇴]]서는 [[고려대학교]] 100주년 기념관에 있는데, 심지어는 유길준이 쓰던 [[틀니]]도 그곳에 있다. 왠지 쓸데없는 짓처럼 여겨질 수도 있지만, [[역사]]적 인물이 사용하던 [[물건]] 혹은 [[신체]] 일부는 누군가에게는 [[인기]]있는 [[수집]]품이자 [[문화재]]이기도 하다.[* [[호레이쇼 넬슨|넬슨]]이나 [[나폴레옹 보나파르트|나폴레옹]]과 같은 경우에는 잘라낸 [[머리카락]]의 일부도 문화재로써 [[박물관]]에 수장되어 있고 가끔 민간 [[경매]]에 나오기도 한다.] == 둘러보기 == [include(틀:김홍집 내각)] [include(틀:아관파천)] [include(틀:조선귀족)] [각주] [[분류:1856년 출생]][[분류:1914년 사망]][[분류:기계 유씨]][[분류:국비유학 출신]][[분류:서울특별시 출신 인물]][[분류:대한제국의 인물]][[분류:급진개화파]][[분류:조선의 반란자]][[분류:김홍집 내각]][[분류:독립협회]][[분류:조선귀족 작위 거부자]]