[include(틀:역대 금 황제)] ||<:><-3><tablealign=right><tablewidth=400><tablebordercolor=#b82647><tablebgcolor=#b82647><tablecolor=#000>{{{#ece5b6 '''금 제7대 황제'''[br]{{{+2 '''衛紹王 | 위소왕'''}}}}}} || ||<-2> '''[[묘호|{{{#fff 묘호}}}]]''' ||<bgcolor=#fff><(> 없음 || ||<-2> '''[[시호|{{{#fff 시호}}}]]''' ||<bgcolor=#fff><(> 소왕(紹王) || ||<-2> '''[[작위|{{{#fff 작위}}}]]''' ||<bgcolor=#fff><(> 위왕(衛王) || ||<-2> '''[[제호|{{{#fff 제호}}}]]''' ||<bgcolor=#fff><(> 폐제(廢帝) || ||<-2> '''[[연호|{{{#fff 연호}}}]]''' ||<bgcolor=#fff><(> 대안(大安, 1209년 ~ 1212년)[br]숭경(崇慶, 1212년 ~ 1213년)[br]지령(至寧, 1213년) || ||<|2> '''[[성씨|{{{#fff 성}}}]]''' || {{{#fff 여진어}}} ||<bgcolor=#fff><(> 온얀(Won-{g}ian) || || {{{#fff 중국어}}} ||<bgcolor=#fff><(> 완안(完顔) || ||<|2> '''[[휘|{{{#fff 휘}}}]]''' || {{{#fff 여진어}}} ||<bgcolor=#fff><(> 과승(果縄) || || {{{#fff 중국어}}} ||<bgcolor=#fff><(> 영제(永濟) || ||<-2> '''{{{#fff 생몰 기간}}}''' ||<bgcolor=#fff><(> ? ~ 1213년 9월 11일 || ||<-2> '''{{{#fff 재위 기간}}}''' ||<bgcolor=#fff><(> 1208년 12월 29일 ~ 1213년 9월 11일 (5년) || [목차] [clearfix] == 개요 == [[시호]]는 소(紹), 또는 [[폐제]](廢帝). 초명은 윤제(允濟)였으나, 즉위한 뒤 영제(永濟)로 [[개명]]했다. [[금세종]]의 7남으로 [[장종(금)|장종]]과 [[선종(금)|선종]]의 숙부이다. [[자(이름)|자]]는 흥승(興勝)으로 즉위 전 작위가 위왕(衛王)이고 [[시호]]가 소(紹)라서 위소왕이라고 부른다. 장종이 아들없이 사망하자 서형 [[금선종|완안오도보(完顔吾睹補)]]가 있었지만 [[서자]] 출신이라 황제가 되지 못했고, 대신 위왕 완안윤제가 황숙의 자격으로 황제가 되었다. 사실은 [[장종(금)|장종]]의 후궁인 승어 가씨의 뱃속에 유복자가 있었으나... 위소왕이 장종의 원비였던 이사아를 싫어해서 가씨가 이사아의 꼬드김에 넘어가 장종의 자식이 아닌데도 장종의 자식이라고 주장한다고 [[개드립]]을 치는 바람에 가씨와 이사아가 피살되어 그대로 복중에서 죽었다. 아마 위소왕 입장에서는 자신의 정통성에 해가 갈까봐 그랬던 것 같다. 새로 즉위한 위소왕은 [[장신]]의 [[미남]]으로 검소한 인물이었지만 우유부단하고 어리석은 인물이기도 했다. 그는 즉위 후 [[칭기즈 칸]]에게 사신을 보내 군신의 예를 갖추기를 요구하였으나, 칭기즈 칸은 무능한 위소왕의 명령을 거부했다. 칭기즈 칸은 장종의 명령은 들었으나, 위소왕이 즉위하자 말을 듣지 않았다. 한번은 새로 황제가 된 이가 누구냐고 금나라 사자에게 물었다가 위소왕이 황제가 되었다는 사자의 말을 듣자, 위소왕이 있는 남쪽을 향해 '''[[침]]을 뱉으며''' '''“난 중원의 천자들은 하늘이 보내신 사람들만 하는 줄로 알았는데 위소왕 같은 인간도 할 수 있다니.”'''라고 [[디스]]를 했다. 이 소식을 들은 위소왕은 [[부들부들]]했으나, 별 조치를 취하지 못했고 더불어 칭기즈 칸도 전혀 겁먹지 않고 오히려 정복 기회로 삼았다.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인이었던 투르크계 웅구트인들이 몽골에서 [[만리장성]]으로 가는 산서성 북부의 길을 금나라를 위해 방어하고 있었다. 하지만 1211년 웅구트의 알라쿠쉬 티긴은 금나라를 정복하려는 칭기즈 칸에게 이 길을 열어주었다. 그는 북경의 옛 주인이었으나, 금나라에 의해 쫓겨난 거란인들과 연합하여 금나라를 공격하였다. 1212년 거란의 옛 영토인 만주 서남부의 [[랴오허|요하]]에서 야율유가가 반란을 일으켰다. 1213년 [[몽골]]이 선화를 정복하고 산서 중부를 돌파하여 태원과 평양을 빼앗았다. 이 후 남으로 기수를 돌려 하북과 산동 평원을 가로질러 하간과 제남을 함락시켰다. 게다가 화북(華北) 일대까지 밀고 내려와 수도 중도 대흥부(中都大興府, 지금의 [[베이징]])가 한 차례 위험에 빠진 적도 있었다. 칭기즈 칸이 북경을 봉쇄 작전으로 공격하려고 했을 때 금 조정에는 궁정 분란이 일어나 위소왕이 승상 흘석렬호사호(紇石烈胡沙虎)[* 남송 전선에서 나름 공을 세운 장수였으나 몽골 전선에선 졸전을 거듭해서 금나라를 위기에 빠뜨렸고, 근무태만에 백성들의 땅과 재산을 강탈하는 등 악명이 높았다. 따라서 역사가들 평가는 이자도 위소왕과 다를 바가 없다는 평. 반란을 일으킨 이유도 몽골 전선에서의 참패와 월권행위로 탄핵받을 것을 우려해 일으킨 것이었다. ]에게 [[암살]]당하였고, 호사호는 위소왕의 조카 오도보를 제위에 앉히니 그가 선종이었다. 공성전에 자신이 없던 칭기즈 칸은 오도보의 화의를 받아들였으며 대신 선조인 [[카마그 몽골]]의 칸 암바가이의 유물과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받고 철수하였다. 이 후 선종이 흘석렬호사호를 [[처형]]하고, 자신이 직접 권력을 움켜쥐었지만 위소왕에 대한 [[복권]] 같은 것은 일체 없었다. 그 이유는 위소왕이 무능한 작자라는 것은 앞서 언급했듯이 저 변경의 [[오랑캐]]였던 칭기즈 칸도 익히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한 지경이라서 복권을 시도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. 거기에 1211년 중도로 진격하는 [[몽골]]군을 막기 위해 [[완안승유]] 휘하의 50만 대군이 격돌한 오사보 전투에서 어이없이 패전하면서 대규모의 군대를 상실하는 통에 금나라의 [[척추]]가 부러지는 큰 타격을 입었으므로 누군가가 [[총대]]를 맬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. 그래서 위소왕은 '''[[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|이게 다 위소왕 때문이다.]]'''로 결론이 나 황제로서의 시호나 묘호를 받지 못하고 왕 시절의 시호만 유지해서 사실상 황제 취급을 하지 않은 것이다. 황후는 종단씨(徒單氏)였으며 자식으로는 황태자 양왕 종각(梁王従恪)을 포함한 네 아들과 원씨(袁氏) 소생의 [[기국공주]](岐國公主)가 있었다. 기국공주는 칭기즈칸의 첩이 되었으며, 그 밖에 위소왕의 형제로는 동복형 정왕 윤도(鄭王 允蹈), 동복 동생 윤덕(允徳) 등이 있었다. == 여담 == || [[파일:attachment/위소왕/위소왕.png]] || || '''[[징기스칸 4]] 일러스트''' || [[징기스칸 4]]에도 나오는데 역시나 능력치는 매우 좋지 않다. 정치 26, 전투 48, 지모 42. AI 장종이 후사없이 사망하면 역사대로 위소왕이 뒤를 잇는다. [[고증오류]]가 있는데 여기서 [[금나라]] [[장종(금)|장제]]의 아내로 나오는 기국공주는 상술했다시피 위소왕의 '''[[근친상간|친딸이다.]]''' == 둘러보기 == [include(틀:금사)] [[분류:금나라의 황제]]