{{{+1 圓明園 }}} [[파일:external/www.china7.jp/yuanmingyuan111.jpg]] [목차] == 개요 == [[북경]] 근처에 있던 [[청나라]] 황실의 호화 정원'''이었다'''. [[자금성]]의 5배 가량인 3.5km^^2^^의 면적에 서양식 건축물, 중국 각 지방의 건축 양식을 모아놓은 건물들이 있었으며, 만원지원(萬園之園, 만 개 중의 정원, 정원 중의 정원)이라고도 불렸다. 또한 청 황실에서 소장한 진귀한 보물과 동식물을 보관한 장소이기도 했다. 유럽식 건축양식의 [[서양루]] 등은 [[주세페 카스틸리오네]]와 다른 유럽인들이 참여하여 설계했다. [[1860년]] [[아편전쟁]] 도중 프랑스군의 약탈에 이어, 포로 살해에 대한 보복인[* 39명이 협상장에 갔다가 체포되어 포로가 됐는데, 다구 포대 전투에서 청군이 너무 깨져서 분노한 청군들이 20명을 죽였다.] 영국군의 공격으로 불에 타 소실되고 소장품들은 모두 약탈당했다. 이에 [[빅토르 위고]]를 비롯한 지식인들은 영국군과 프랑스군을 비판했다.[* 게다가 원명원을 불태운 8대 엘긴 백작 [[https://en.wikipedia.org/wiki/James_Bruce,_8th_Earl_of_Elgin#China_and_Japan|제임스 브루스]]의 아버지 7대 엘긴 백작 [[https://en.wikipedia.org/wiki/Thomas_Bruce,_7th_Earl_of_Elgin|토마스 브루스]]는 그 유명한 [[엘긴 마블]]을 [[파르테논 신전]]에서 떼온 인간이시도 하다.] [[서태후]]가 [[함풍제]]와 처음 만나 사랑을 나누던 곳이기도 하다. 원명원이 불타 없어진 후 서태후가 거금을 들여 원명원 재건사업을 추진하려고 했으나[* 서태후는 원명원을 재건해 함풍제와의 추억을 되살리고 싶어했다고..] 재정낭비라며 [[동태후]]의 강한 반대로 무산되었다. 동태후는 서태후가 함풍제와의 사랑의 장소가 재건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한다. 만약 재건되었다면 ~~청나라의 재정난이 더욱 심각해지는 대신~~[* 아마 청나라판 [[경복궁]] 중건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. 경복궁이 [[임진왜란]]으로 불타 없어졌다가 훗날 [[고종(대한제국)|고종]] 치세에 그의 아버지인 [[흥선대원군]]의 주도로 재건되었으니 말이다.] 현대에 [[이화원]] 못지않은 관광지가 되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역사에 만약은 없으니... 현재는 공원화되었다. [[http://gall.dcinside.com/mgallery/board/view/?id=alternative_history&no=19626&page=1|원명원의 파괴 이전과 이후 모습들]] == 복원 == [[파일:external/img.yonhapnews.co.kr/AKR20150418030400089_01_i.jpg]] 하지만 그런 동태후의 바람도 21세기까지 미치지는 못했는지 후손들이 [[저장성]]에 [[http://www.yonhapnews.co.kr/bulletin/2015/04/18/0200000000AKR20150418030400089.HTML|실물 크기로 복원]]하였다. [각주] [[분류:중국의 관광지]][[분류:중국의 없어진 건축물]]