||<-5><tablealign=center><tablebordercolor=#fedc89><tablewidth=100%><bgcolor=#fedc89> '''[[고려/역대 왕비|{{{#670000 고려의 역대 왕후}}}]]''' || ||<bgcolor=#ffffff><width=30%> [[희종(고려)|희종]]비[br][[성평왕후]] ||<bgcolor=#ffffff> {{{+1 ←}}} ||<width=30%><bgcolor=#fedc89> '''강종비'''[br]사평왕후[br]'''원덕태후''' ||<bgcolor=#ffffff> {{{+1 →}}} ||<bgcolor=#ffffff><width=30%> [[고종(고려)|고종]]비[br][[안혜태후]] || ||<-2><tablealign=center><tablebordercolor=#fedc89><bgcolor=#fedc89> '''{{{#670000 시호}}}''' ||<bgcolor=#ffffff>'''정강원덕태후(貞康元德太后)''' || ||<-2><bgcolor=#fedc89> '''{{{#670000 존호}}}''' ||<bgcolor=#ffffff>연덕궁주(延德宮主) - 왕비(王妃)[br]왕태후(王太后) / 황태후(皇太后)[br]태황태후(太皇太后)(?) || ||<-2><bgcolor=#fedc89> '''{{{#670000 작위}}}''' ||<bgcolor=#ffffff>태자비(太子妃)[br]연덕궁주(延德宮主) || ||<-2><bgcolor=#fedc89> '''{{{#670000 관저}}}''' ||<bgcolor=#ffffff>[[연덕궁]](延德宮) || ||<-2><bgcolor=#fedc89> '''{{{#670000 본관}}}''' ||<bgcolor=#ffffff>?? 유씨(柳氏) || ||<-2><bgcolor=#fedc89> '''{{{#670000 능호}}}''' ||<bgcolor=#ffffff>곤릉(坤陵) || ||<-2><bgcolor=#fedc89> '''{{{#670000 생몰연도}}}''' ||<bgcolor=#ffffff>? ~ 1239 || [목차] == 개요 == [[강종(고려)|강종]]의 2비. 시호는 강종 元효대왕과 元 자 돌림이다. [[고종(고려)|고종 안효왕]]의 모후이며 생전 태후로 올려졌다. == 가족관계 == 원덕태후는 부계로는 [[현종(고려)|현종 원문왕]]의 후손이며 모계로는 [[인종(고려)|인종 공효왕]]의 후손이다. 아버지는 신안후 왕성, 어머니는 인종과 [[공예태후]]의 셋째 딸 창락궁주다. 부계 족보는 현종 → [[정간왕]] → 경안공(敬安公) 왕영(王瑛)[* 정간왕의 둘째 아들. 작위는 낙랑백 → 낙랑후 → 낙랑공(樂浪公)이었다. 시호는 경안공.] → 승화백(承化伯) 왕정(王禎) → 한남백(漢南伯) 왕기(王杞) → 신안후(信安侯) 왕성(王珹) 순이다. 모계 족보는 인종 → 창락궁주(昌樂宮主) 순이다. 이렇듯 강종과 원덕태후는 부계로는 멀어도 모계로는 상당히 가까웠는데 두 사람은 외사촌(강종 입장에서는 고종사촌) 관계이다. 자녀는 고종 하나이다. == 생애 == 강종이 명종의 태자였을 시절, 두번째 태자비(太子妃)로 들어왔다. 강종의 첫 태자비[* 훗날 사평왕후로 추존되었다.]는 [[이의방]]의 딸이었고, 둘 사이에 이미 딸도 하나 있었다. 그러나 첫번째 태자비는 1174년 이의방이 실각하자 폐출되었다. 그렇게 1175년 9월, 원덕태후는 새로운 태자비가 되었다. 두 사람의 아들인 왕진은 1192년 1월에 태어난다. 1197년, [[최충헌]], [[최충수]] 형제에 의해 [[북궁]]에서 폐태자된 남편을 따라 같이 강화도로 떠난다. 1211년 당시 군주 [[희종(고려)|희종 성효대왕]]이 [[수창궁]]에서 최충헌을 죽이려 시도 했다가 실패, 강화도로 내쫓기는 일이 발생한다. 최충헌은 결국 다시 강종을 소환했고, 태자비도 다시 [[만월대]]에 복귀한다. 1212년 10월, 태자비는 [[연덕궁]]주(延德宮主), 이어 연덕궁주(延德宮主) - 왕비(王妃)에 봉해져 정식 왕후가 된다. 사평왕후의 딸 수령궁주를 잘 보살핀 듯하다. 수령궁주는 결혼할 때 아버지 강종과 의붓어머니 연덕궁주 - 왕비에게 표문(表文)을 바쳤는데 이 때 왕비에게 자신을 보살펴 주어 감사하다고 하고 있다. 남편 강종은 너무 늙어 1213년에 붕어하니, 연덕궁주 - 왕비는 혼자가 되었다. 남편을 이어 아들 왕진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고종이다. 연덕궁주 - 왕비가 언제 태후가 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1215년 9월, 연덕궁주 - 왕비는 아들과 함께 청주동궁(淸州洞宮)으로 거처를 잠시 옮긴다. 이 때부터 [[왕태후]](王太后)란 [[존호]]로 사서에 등장하기 시작한다. 1216년 1월, 자신의 어머니 창락공주가 죽었다. 외손자인 고종은 3일동안 소복을 입었다고 한다. 1218년 4월, 며느리 [[안혜태후]]가 들어왔다. 1219년 3월, 손자 [[원종(고려)|왕전]]이 태어났다. 1220년 10월, 오빠인 영인후(寧仁侯) 왕진(王稹)이 죽었다. 1223년 10월, 아들 고종은 [[황태후]]를 [[태황태후]]로 올렸다. 이 황태후가 누구인지 고려사 고종 세가는 명시해두지 않았다. 하지만 1년 전에 죽은 [[선정태후]]이거나 당시 살아있던 원덕태후일 것이다. 만약 원덕태후가 맞다면 그는 고려사 최초로 살아서 태황태후가 된 여인이다. 1332년, [[만월대|상도(上都)]]을 떠나 [[고려궁지|강도(江都)]]로 천도하였다. 이 혼란스러울 때에 며느리가 죽었다. 1235년 6월, 손자 [[원종(고려)|왕전]]이 [[순경태후|결혼하였다.]] 1236년 2월, 증손자 [[충렬왕|왕심]]이 태어났다. 1239년 5월, 몽고의 침입으로 인해 나라가 엉망진창일 때 훙(薨)하였다. == 평가 == 한 때 태자비로서 본궐 내명부의 2인자였으나 폐위되었고, 다시 돌아와 왕후, 이어 태후로서 내명부의 1인자가 되었으나 전쟁으로 인해 강화도에 숨었고 나오지 못하고 죽었다. 여러모로 다이나믹한 삶을 산 태후이다. == 왕릉 == 능호는 곤릉(坤陵)이며 현재 [[대한민국]] [[인천광역시]] [[강화군]] 양도면 길정리에 있다. 강화도엔 총 4기의 고려 왕릉이 존재하는데 태후의 곤릉, 아들 [[고종(고려)|고종]]의 홍릉(洪陵), 사촌 [[희종(고려)|희종]]의 석릉(碩陵), 손자 며느리 [[순경태후]]의 가릉(嘉陵)이다. == 왕실의 중시조 == 원덕태후의 아들 고종부터 → 원종 → [[충렬왕]] → [[충선왕]] → [[충숙왕]] → [[충혜왕]] → [[충목왕]] → [[충정왕]] → [[공민왕]] → [[우왕]] → [[창왕]]까지 총 10명의 왕이 원덕태후의 피를 이었다. 충선왕 대부턴 몽고 황실의 피가 섞이긴 하지만. [[분류:1239년 사망]][[분류:고려의 공주]][[분류:고려의 왕비]]