[[파일:Johannes Steinhoff.jpg]] [[분류:1913년 출생]][[분류:1994년 사망]] '''요하네스 슈타인호프(Johannes Steinhoff : 1913년 9월 15일~1994년 2월 21일)''' [include(틀:2차 세계대전/전투기 에이스 21~30위)] [[루프트바페]]에서 [[소위]]로 복무를 시작해 [[2차 대전]] 동안 [[대령]]까지 진급한 수퍼 [[에이스]]이며, [[서독]] 공군의 재건에도 활약한 인물. [목차] == 우수한 학생 == [[독일]] 중부 [[튀링겐]]주의 보텐도르프에서 제분업자의 3남 2녀 중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난 슈타인호프는 어려서부터 독서를 아주 좋아하고 탐구심이 왕성한 학구적인 소년이었다. 소싯적에는 한스라 불린 그가 대학에 진학하기 전에 이미 [[불어]]와 [[영어]], [[라틴어]]에다 [[헬라어]]까지 익혔던 것을 보면 두뇌가 비상했던 모양이다. 한스는 [[예나 대학교]]에서 [[철학]]을 전공하게 되었지만, 원래 집안이 그리 부유하진 못했던데다가 그가 학교에 들어간 후부터는 가세가 기울어 학비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된다. == 해군에 입대 == 이처럼 집안이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고통받고 공부를 계속할 수가 없게 되자 학교를 중퇴하고 [[독일 해군]]에 지원해 입대하게 된다. 해군에서 조타수로 훈련을 받던 그는 [[해군 항공대]]에서 사귀게 된 친구 [[디트리히 흐라박]]이 신생 [[루프트바페|독일 공군]]으로 이적할 때 따라가게 된다. 친구 따라 강남에 간 이야기가 바로 그에게 해당될 것이다. [[1936년]]에 독일 공군으로 전속을 간 그는 [[전투조종사]] 훈련을 마치고 장교가 되어 제26전투항공단([[JG 26]])에 배치되었다. 묘하게도 슈타인호프는 원래 파일럿 지망은 아니었으나 뛰어난 조종 실력을 몸에 익히게 되었고, [[1939년]] 4월 29일에는 아내 우르슬라를 맞아들여 결혼도 하게 된다. == 유럽 전선에서 == 그는 대전 초기에 활약한 다른 에이스들처럼 [[폴란드]]나 [[네덜란드]] 침공 작전을 경험하지는 못했다. 독일이 유럽 침공을 시작했을 때, 그는 [[중위]]로 진급해 있었고 처음 적기를 만난 것은 독일 북서부의 [[빌헬름스하펜]]에 공습을 하러 날아온 [[빅커스 웰링턴|비커즈 웰링턴]] 폭격기를 맞아 싸워 격추한 것이었다. [[1940년]] 2월에는 제52전투항공단 예하 제4비행중대(4./JG 52)로 소속을 옮겼고, 슈타인호프 중위는 이 부대에서 [[프랑스 침공]]과 [[영국 본토 항공전]]을 치루게 된다. == 러시아 전선에서 == 이후 전선이 확대되자 [[1941년]] 6월부터 [[독소전|동부 전선]]으로 가게 된 [[JG 52]]의 선임 비행대장으로 임명되었다. 노련하고 결연한 의지로 무장한 영국 조종사들이 모는 [[슈퍼마린 스핏파이어]]와 [[호커 허리케인]] 같은 뛰어난 성능을 가진 적기들과 어렵게 싸우다가 러시아에서 마주친 [[소련]] 공군은 짐작 그대로 너무나 쉬운 상대였다. 슈타인호프는 [[동부전선]]에서 전투를 개시한 첫 달 동안에만 무려 28대의 적기를 확인 격추하는 엄청난 무공을 세웠다. 그 해 8월까지 35대를 해치운 그는 [[철십자 훈장|기사철십자장]]을 수여받게 된다. 이듬해인 [[1942년]] 2월에 [[대위]]로 진급한 슈타인호프는 제II비행단(II./JG 52)을 지휘하게 되면서 격추 페이스는 더욱 급상승했고, 그해 8월 31일까지 자신의 격추수를 100대로 늘려 놓았다. 요하네스 슈타인호프 대위는 루프트바페에서 18번째로 수직 미익에 100대 격추를 의미하는 센튜리 마크를 그려넣을 수 있었다. 그는 [[1943년]] 3월까지 JG 52에서 복무하다가 사령부로부터 [[소령]] 계급장을 받으며 [[지중해]]에서 작전하고 있는 제77전투항공단([[JG 77]])의 사령관으로 부임하라는 명을 받았다. [[1944년]] 7월 28일에는 [[철십자 훈장|곡엽검 기사철십자장]]까지 받은 그였지만, 이 시절의 그는 점차 공군 원수 [[헤르만 괴링]]과 불화가 심해져 결국 본국으로 송환되었다. 여담으로 그는 전원 여성으로 이루어져있던 [[제46 친위 야간폭격 비행연대]]의 활약을 목격하고 이런 말을 남겼다. >나와 동료들은 우리에게 심각한 피해를 입히던 자들이 여성들로만 이루어져 있는 비행대라는 것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. '''그녀들은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.''' == 본토 방공전에서 == 1944년 10월에는 전사한 [[발터 노보트니]]가 지휘하던 제트전투기 부대 제7전투항공단([[JG 7]])의 지휘봉이 맡겨졌다. 그토록 명성이 자자한 슈타인호프였지만 [[1945년]] 벽두에 벌어진 [[https://blog.naver.com/naljava69/220613450105|전투기 조종사들의 반란]] 사건 이후 완벽히 괴링의 눈밖에 나게 된 그는 한직을 떠돌게 되었고, 그 처벌로 본토 방공을 위해 신설된 [[JV-44|JV 44]]에서 그와 마찬가지로 좌천된 [[아돌프 갈란트]]의 지휘를 받으며 메서슈밋 [[Me 262]]를 타게 되었다. 총 993회 출격에서 적기 178기를 격추시키는 전과를 올린 요하네스 슈타인호프 대령이었지만, 그런 대기록을 세우면서 그 자신도 12회나 격추되었다. 그렇지만 낙하산 탈출은 딱 한번이었고 전부 어떻게 해서든 기체를 살리는 불시착이었다. 그의 두둑한 배짱을 알 수 있는 통계치라고 하겠다. 그는 독일이 패하기 직전인 1945년 4월 18일에 Me 262를 몰고 이륙하다가 활주로의 폭탄 구덩이에 빠져 기체가 전복되면서 큰 화재가 나서 전신에 중화상을 입고 병원으로 후송되었다. 슈타인호프는 입원한 채로 종전을 맞이했지만 얼굴에 남은 화상의 흔적은 평생 그를 따라다녔다. == 종전 이후의 행적 == 1945년부터 [[1947년]]까지 2년간이나 병원에서 화상 치료를 받은 슈타인호프는 퇴원한 후 [[도자기]]를 만들다가 [[1950년]]에 광고회사에 입사했다. 그러나 [[서독]]이 재군비를 위해 슈타인호프를 영입하면서 곧바로 회사를 그만두었다. 유럽방위공동체의 협상단 임원으로도 일한 그는 [[1954년]]부터 서독 공군의 재건 책임자가 되었다. [[1955년]] 11월에 정식으로 창설된 독일 연방군에 다시 입대한 슈타인호프는 [[1956년]] 3월까지 [[미국]]에서 비행 훈련을 받고 귀국한 다음 곧바로 [[준장]]으로 진급하면서 서독 국방성 제6국 계획부장으로 취임했다. 이후 공군 참모차장을 거쳐 [[NATO]] 군사위원회 서독 대표라는 보직까지 역임한 슈타인호프는 [[1962년]]에 [[소장(계급)|소장]]으로 승진했다. [[1963년]]에 제4항공사단장을 거친 그는 [[1965년]]에 [[중장]]으로 승진해 유럽연합 공군 참모장 및 부사령관이라는 고위 장성이 되었다. [[1966년]]에 공군 총감을 거쳐 [[1970년]]에 NATO 군사위원장으로 선출된 그는 [[대장(계급)|대장]]까지 승진해 3년간 더 복무하고 [[1974년]]에 퇴역했다. 예편한 다음에는 [[도르니에]] 사에 고문 자격으로 들어갔다가 [[1977년]]에는 사장이 되어 [[1983년]]까지 근무했다. 모든 공직에서 은퇴한 슈타인호프는 독일 서부의 고데스베르크에서 살며 가끔 항공 행사에 얼굴을 내밀기도 했고, 회고록도 쓰다가 [[1994년]]에 [[본(독일)|본]]에서 심장질환으로 사망했다. == 창작물에서 == 본인이 직접 등장하진 않지만 [[마브러브 시리즈]]의 번외편으로써 1983년 동독의 이야기를 다룬 [[슈발체스마켄]]의 서독군 여위사인 [[키르케 슈타인호프]]가 이 사람의 손녀라는 설정이다. [[분류:에이스 파일럿]][[분류:제2차 세계 대전/군인]]