[include(틀:다른 뜻1, other1=고려의 16대 왕, rd1=예종(고려), other2=고려의 32대 왕, rd2=우왕)] ||<-2><tablebordercolor=black><tablebgcolor=#fedc89><tablealign=right><colcolor=#670000> {{{-1 '''고려국 영삼사 종부시사'''}}}[br]{{{-1 '''마전군 귀의군'''}}}[br]{{{+1 '''왕우'''}}} || || '''시호''' ||<colbgcolor=#ffffff,#2d2f34>경희(景禧) || || '''작위''' ||정양군(定陽君)[br]정양부원군(定陽府院君)[br]귀의군(歸義君) || || '''본관''' ||[[개성 왕씨]] || || '''휘''' ||우(瑀)|| || '''생몰년도''' ||?~1397 || [목차] [clearfix] == 개요 == [[고려]]의 왕자. 삼한국 인효대공 왕균의 아들로, [[공양왕]]의 동복동생이다. 조선을 건국한 [[이성계]]와는 [[사돈]] 관계였다. == 생애 == 형 장창부원군 왕요가 왕위에 오른 1389년 겨울, [[우왕]]과 [[창왕]]이 서인으로 강등되고 왕의 장인 이림(李琳)과 일가족이 유배보내질 때에 정양군 왕우는 군사를 이끌고 개성 인근의 [[장단군|장단]]에 주둔해 유사시에 대비했다. 형이 즉위한 해에 [[부원군]] 판문하를 거쳐 영삼사 종부시사의 관직에 오른다. 공양왕이 4대조를 추숭하자 형을 대신해 제사를 맡기도 했다. 1390년에는 공양왕 즉위 9공신의 일원인 [[지용기]]가 [[충선왕]]의 서증손 왕익부(王益富)를 집에 들이며 내통했다는 사실을 공양왕에게 알렸다. 1391년 영삼사사에 올랐다. 1392년 조선이 건국된 후 [[태조(조선)|태조]]는 나라에 공이 있는 왕승(王昇)과 그 후손, 그리고 고려 왕조의 제사를 지낼 왕우와 그 후손은 섬에 보내지 않고 남겨두라고 명한다. 왕우는 귀의군(歸義君) 작위를 받고 경기도 마전군(麻田郡, 현재의 [[연천군]] 미산면 일대)의 앙암사(仰庵寺, 현재 연천 숭의전지)에서 왕씨의 제사를 지낸다. 태조는 왕우와 격구를 즐기면서 왕우를 마전군에 봉한 까닭을 설명하는데, 둘이 사돈 관계라서 용서하는 것이 아니고 '[[주나라]]에서 [[미자계|미자]]를 [[송(춘추전국시대)|송나라]]에 [[이왕삼각|봉한 것과 같다]]'고 한다. 왕우의 아들들은 외가 성인 노씨로 성을 갈았다. 1394년 왕씨의 역모 사건에 왕우도 표적이 됐다. 왕화와 [[박위]] 등의 국문에서 정양군, 즉 왕우의 이름이 오르내린 것이다. 여러 신하가 왕우와 두 아들을 섬으로 보내거나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다. 그러나 태조는 매번 '고려에 제사를 지내야 한다'는 이유로 삼부자를 사면했다. 계속되는 탄핵 속에서 1397년에 죽으니 예장하고 경희(景僖)의 시호를 받았다. [* 사실 1년 뒤를 생각하면 이때 죽은게 다행일지도 모른다. 왕우는 이방번의 장인이었으며, 그 아들들이 그랬듯 [[1차 왕자의 난]]때 이방원 무리에게 죽임을 당하고도 남았을 것이다.] == 가족관계 == * '''왕우''' * 처: 노씨(盧氏) === 자녀 === * 장남: [[왕조(고려)|정강군(定康君) 왕조(王珇)]] * 차남: 왕관(王琯) * 여: 경녕옹주 왕씨 [[무안대군|무안대군(撫安大君) 이방번(李芳蕃)]]의 처. 삼한국대부인이라고도 한다. [[태종(조선)|태종]]으로부터 쌀을 받은 기록이 보인다. 경녕옹주는 태조실록 왕우의 졸기에서 보이는 유일한 딸이나, 여러 기록을 종합하면 보다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. * 여: 개성 왕씨 평양군(平陽君) 박석명(朴錫命)의 처. 박석명은 왕우의 사위였는데 고려가 망한 뒤에는 8년동안 관직에 공백이 있었다. 태종 시기부터 좌승지로 다시 관직 생활을 이어간다. * 여: 개성 왕씨 [[http://www.rfo.co.kr/view_party.php?list_mode=people1&refnum=022&party_name=|#]] 순녕군(順寧君) 이덕근(李德根)의 처. [[분류:고려의 왕자]][[분류:조선/인물]][[분류:1397년 사망]]