[목차] == 개요 == 王亞樵. 중화민국의 정치인. 공작의 대가로 [[다이리]]에 맞먹는 자객으로 암살대왕, 부두방주, 인간마귀로 악명을 떨쳤다. 하지만 [[장제스]]에 절대적인 충성을 바친 다이리와 달리 반장파의 일원으로 서남파를 지원하여 수차례 [[장제스]], [[왕징웨이]] 암살을 시도하였다. == 생애 == 1889년 안휘성 합비에서 관을 파는 동네 의원의 아들로 출생했다. 1908년 중국 동맹회에 가입했으며 1911년 [[무창봉기]]가 일어나자 [[신해혁명]]에 참가했다. 중화민국 건국 후 1912년 사회당에 입당, 안휘성 지부장을 담당했다. 1913년 안휘독군 [[니쓰충]]의 독재가 강화되자 상하이로 이주하였으며 그곳에서 안휘방이라 불리는 안휘성 출신 청방 조직의 우두머리가 되었다. 왕야차오는 1921년 비밀결사인 상하이 영공회를 조직, 노동조합과 상하이 암흑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. 그런 왕야차오를 눈여겨본 절강독군 겸 상하이의 지배자였던 [[루융샹]]은 1923년, 왕야차오를 절강종대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. 이때 이미 왕야차오는 암살대왕으로 불리고 있었다. 상하이 암흑가를 떠돌던 [[다이리]]도 왕야차오의 추종자가 되어 그의 통치기술을 배웠다. 1923년 봄에서 가을, 장강 하류의 통제권을 둘러싼 군벌들간의 다툼에서 왕야차오는 용병단을 조직해서 군벌들에게 제공했으며 이 때문에 상하이 경찰국의 요주시 인물로 등록되었다. 그러던 왕야차오는 갑자기 볼셰비즘 혁명을 지지하고 나섰으며 이 때문에 상하이 경찰은 1923년 11월, 공산주의자들이 왕야차오의 청방 조직원들과 힘을 합쳐 상하이에서 공산주의 혁명을 일으킬 것을 우려하여 왕야차오에 대한 집중감시를 시작하였다. 1924년 [[강절전쟁]]이 벌어지자 상하이의 지배자였던 절강독군 [[루융샹]]으로부터 사령관에 임명하여 싸웠으나 [[쑨촨팡]], [[치셰위안]]의 공격에 중과부적으로 패하였으나 직예군벌이 파견한 상하이 경찰대장 서국량을 암살하는데는 성공했다. 1926년 안휘선위부사에 임명되었으며 상하이의 노동운동에 참여했다. [[국민당의 1차 북벌]]이 시작되자 [[국민혁명군]]에 호응하여 북양군벌과 싸웠으나 반장파가 되어 이후 장제스와 쑹쯔원 암살을 계속해서 시도했다. 동방무정부주의연맹의 간부로 활동했으나 동방무정부주의연맹의 무력함에 실망하여 다른 간부인 화균실과 함께 1931년 11월, 중순 한국의 독립운동가 [[이회영]], [[백정기]], [[정화암]] 등과 힘을 합쳐 기존의 동방무정부주의연맹을 대체할 새로운 조직인 항일구국연맹을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지에서 수립하고 산하의 흑색공포단의 활동 경비와 무기를 제공하였다. 하지만 모종의 이유로 흑색공포단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였고 항일구국연맹은 자연스럽게 와해되었다. 중국 측 자료에 따르면 이때 김구와 힘을 합쳐 한인애국단에게 무기, 자동차, 자금을 지원하는 한편 [[만주사변]]을 획책했던 일본군의 [[이타가키 세이시로]]를 암살하려고 했으며 [[이봉창]] 의사의 사쿠라다몬 의거를 지원했다고 하는데 글쎄...? 학계의 연구에 따르면 왕야차오가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을 지원한 것은 사실이지만 장제스 계열의 한인애국당이 아니라 남화한인청년연맹 등을 지원했을 가능성이 높다. 1931년 7월 국민정부 재정부장 [[쑹쯔원]]에 대한 암살을 시도했으나 그의 비서만 죽이고 실패로 돌아갔다. 1931년 12월부터 1932년 10월까지 남화한인청년연맹에 1200불의 자금을 지원했으며 한국 독립운동가 [[원심창]]에게도 1931년 9월부터 1년 동안 생활비를 제공했다. 또한 [[백정기]]를 도와 주중 일본공사 [[아리요시 아키라]] 암살에 자금을 지원해주었다. [[만주사변]] 발발 후 [[장쉐량]]이 사직을 통전하자 그에게 폭탄을 보내기도 했다. 1932년 1월, [[제1차 상하이 사변]]이 일어나자 일본에 대항하는 의용군을 조직했다. 그리고 중국무역기선회사 전무이사 조철교를 비롯하여 일본에 협력하는 걸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닥치는대로 암살했으며 상하이의 국제연맹 대표들에 대한 암살도 기도했다. 1932년 4월, 국민정부 [[중화민국 행정원장|행정원장]] 대리 [[천밍수]], 19로군 총지휘 [[장광나이]], 19로군 군장 [[차이팅카이]]의 사주를 받고 [[제1차 상하이 사변]]에 승리한 것을 축하하는 일본군의 경축대회장에 테러를 자행하려 했는데 중국 학계에서는 이를 두고 천밍수가 왕야차오와 [[김구]], [[안창호]]를 연결시켜주어 왕야차오가 김구에게 자신이 만든 폭탄과 활동비 4만원을 제공하는 등 [[훙커우 공원 의거]]의 중요 참여자라고 주장하지만 장제스와 친밀했던 김구와 왕야차오가 연계되었을 가능성은 희박한 편이며 둘이 힘을 합쳤다는 그 어떠한 문서적 증거도 남아있지 않다. 다만 백정기의 별개의 거사를 돕기 위해 그에게 권총을 구해준 것 등은 확인되는데 중국 학계에서 주장하는 것도 백정기와 왕야차오의 관계를 두고 김구와의 관계로 침소봉대하는 것일지도? 오히려 독립운동가 [[정현섭]]의 회고에 따르면, 왕야차오는 [[후한민]], [[바이충시]], [[리쭝런]], [[천밍수]], [[차이팅카이]] 등 서남의 정객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장제스의 선안내후양외 정책을 비판하며 그에 대한 암살을 시도했는데 이를 위해 장제스의 지원을 받던 조선인 무정부주의자들에게 일부러 접근하여 장제스 암살에 이용하려고 했다고 한다. 이 때문에 장제스도 왕야차오를 몹시 두려워했으며 그의 이름이 들리면 틀니까지 떨면서 창문이 잘 잠겼는지부터 확인했다고 한다. 상하이 타임즈는 왕야차오를 공공의 적 1호로 보도했으며 왕야차오의 악명이 이 정도에 이르자 [[다이리]]가 왕야차오를 제거하기 위해 수차례 공작을 벌였으나 실패했다. 다이리의 추격을 피해 [[1차 양광사변]] 이후로 서남정무위원회를 설치하여 자치를 실시하고 있던 광동성 오주로 피신한 왕야차오는 1935년 11월, 광동파 정객 [[리지선]]과 [[천밍수]]의 사주를 받고 정부에 불만이 많던 전직 군인인 기자 손봉명을 이용하여 [[왕징웨이 저격 사건]]을 일으켰다. 이때 왕징웨이의 척추에 박힌 총알은 끝내 제거되지 않아 골수암으로 이어졌고 왕징웨이는 이 때문에 일본 나고야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. 이후 외교부 차장 탕유런도 왕야차오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. 결국 다이리는 왕아초의 부하인 여립규를 체포, 그의 첩인 여완균을 매수하여 왕야차오에게 접근, 1936년 9월에 그를 사살하였다. == 참고문헌 == * 서안사변, 나가노 히로무, 일월서각. * 장제스와 국민당 엘리티스트, 정두음, 도서출판선인. * Spymaster: Dai Li and the Chinese Secret Service, Frederik Wakeman JR.,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. * 윤봉길의 상해의거 '중국측 역할', 김광재, 한국민족운동사연구 33호, 한국민족운동사학회. * 윤봉길의거 이후 蔣介石 · 국민정부의 한국독립운동 지원과 ‘長期抗戰 ’, 배경한, 역사학보 236호, 역사학회. [[분류:국민정부의 정치인]][[분류:1889년 출생]][[분류:1936년 사망]][[분류:암살된 인물]]