溫君解 ? ~ 648년 [목차] == 개요 == [[7세기]] [[신라]]의 인물. == 생애 == 신라는 앞서 642년 [[고구려]]와 동맹을 맺기 위해 [[태종 무열왕|김춘추]]를 사신으로 보냈으나 회담은 결렬되고 김춘추가 갇혔다가 거짓말로 겨우 탈출해나오는 일을 겪어 고구려와는 적대적 관계로 돌아선 상태였다. 648년에는 고구려의 적대국인 [[당나라]]에 김춘추가 사신으로 보내졌는데 성공적으로 회담을 마치고 귀국하던 중 [[서해]] 바다 위에서 고구려 해군을 만났다. 고구려군은 김춘추를 잡아 죽이려 했지만 그를 보좌하던 온군해가 말리는 김춘추에게 간청하며 김춘추의 복장으로 갈아입은 후 김춘추를 대신하여 죽었다. 이덕분에 김춘추는 무사히 돌아갈 수 있었다. 같은 [[온씨]]라는 점에서 가까운 시대 [[고구려]]측 인물인 [[온달]]이나 [[온사문]]과 한 집안이 아니냐는 주장도 있는데, 그래서 온군해를 고구려 계통 가문으로 설정하는 미디어도 간혹 있지만 결정적인 근거는 전혀 없다. 애시당초 지배층을 제외하면 성씨가 일반적이던 시절도 아니다. [[골품제]]에 의해 진골 이상만 오를 수 있는 직책인 대아찬에 추증된 것을 보아 김춘추를 다룬 각종 창작물에서 김춘추의 일개 종자처럼 묘사되는 경우가 많은 것과는 달리 엄연히 신라에서 뿌리를 내린 [[진골]] 귀족이었을 가능성이 높다. 다만 김춘추는 신라 역사에서는 상대적으로 골품제에 크게 얽메이지 않았고 능력 위주의 인사와 논공행상을 벌이기도 했기 때문에[* 그 외에도 김춘추는 [[강수]]를 중용하거나 [[원효]]와 요석공주를 결혼시켰다는 사례에서 볼 수 있듯 [[6두품]] 인사들을 적극 기용했던 인물이기도 했다. 이는 열기, 구근의 사례가 있는 김유신이나 소나를 추증시킨 [[문무왕]]도 마찬가지였다.], 그리고 [[죽죽]]처럼 골품이 낮은 지방민일 가능성이 높은 인물이 사후에 6두품 관등으로 추증되는 것을 볼 때 일단 죽음으로 공을 세운 뒤 추증받을 때는 골품이 올라가는 것도 가능해 보이는 정황이 기록에서 종종 나오기 때문에 온군해 역시 생전에는 진골이 아니었을 가능성도 있다. == 대중매체에서 == 온군해가 대신 죽는 부분은 구체적으로 급박한 순간이 기록된 부분이라 김춘추가 등장하는 매체에서 곧잘 등장한다. [[KBS 대하드라마]] [[대왕의 꿈]]에서는 김춘추가 어릴 적부터 따른 시종으로 아역 온군해([[노영주]])가 등장한다. 그런데 온군해는 정작 성인 배우로 넘어가면 등장하지 않고, 서해 바다에서 고구려군에 대신 죽는 부분은 [[난승]]([[김경룡]])이 대신한다. [각주] [[분류:생년 미상]][[분류:648년 사망]][[분류:신라의 인물]]