[include(틀:한국의 서원)] [include(틀:경주시의 관광)] [youtube(xZ7a434Fc4g)] 玉山書院 [목차] == 개요 == [[경상북도]] [[경주시]] [[안강읍]] 옥산리에 있는 [[서원]]이다. [[문묘]] 종사와 [[종묘]] 배향을 동시에 이루고 영남학파의 정신적 지주로 추대된 [[이언적]]을 주향하는 서원으로서 [[도산서원]]과 함께 영남 남인의 정신적 본산이며, [[조선]]시대 서원 건축의 대표 양식을 보여준다. 1967년 [[대한민국의 사적|사적]] 제154호로 지정되었다. [[병산서원]]과 함께 [[유네스코]] [[세계유산]]에 중복으로 등재되어 있는데 2010년 7월 31일 [[양동마을]]의 일부로 먼저 등재되었다. 경주 양동마을은 같은 경주시 안에 있어도 옥산서원과 직선거리 8km 정도로 떨어져 있지만, 세계유산으로서는 옥산서원, 독락당, 동강서원을 포함해 '하회와 양동'의 일부로 등록되었다. 이 서원의 주인공인 [[이언적]]의 집과 그의 가문인 여강 이씨의 본진이 양동마을이었던 등 거리가 멀지만 관련성이 많기 때문이다. 2019년 7월 6일에는 [[한국의 서원]] 중 하나로도 등재되어 세계유산 2관왕이 되었다. == 역사적 흐름 == [[이언적]]은 [[조선]]시대 최초로 체계적인 [[성리학]] 저술을 다수 남긴 주리론의 선구자였다. [[을사사화]]로 희생된 후 유배지에서 생을 마친 뒤 약 14년이 지나서 [[선조(조선)|선조]] 조에 처음 신원되고 그 유문을 수집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. 이후 차례로 1568년(선조 1) [[영의정]] 추증, 1569년(선조 2) [[종묘]] 배향이 이루어졌다. 그리하여 그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1572년(선조 5년) 경주부윤 이제민 및 회재의 제자 군수 권덕린 등 관료 및 유림([[선비]]들의 집단)이 처음으로 서원을 세웠으며, 1574년(선조 7) [[선조(조선)|선조]]로부터 '옥산'이라는 이름으로 사액을 받았다. 1610년(광해군 2) [[문묘]] 종사에 따라 위상이 더욱 높아졌다. 이에 [[경주시]]지역 향촌사회를 실질적으로 대표하면서 지역 유림들의 교육 및 정치사회적 활동의 중심지로 역할 하였을 뿐만 아니라 [[이언적]]이 [[이황]]과 함께 [[영남]] [[남인]]의 정신적 지주로 추앙됨에 따라 [[안동]]의 도산서원과 더불어 영남의 수원(首院)으로 자리매김 하였다. [[갑술환국]] 이후 [[노론]]이 정권을 잡게됨에 따라 침체를 겪었으나 그런 가운데 18세기 말에 [[이언적]]의 학문이 [[영조]] 및 [[정조(조선)|정조]]에 의해 주목 받으면서 그를 제향하는 옥산서원 역시 다시금 중앙정부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. 특히 정조의 관심은 지대하여, 1781년(정조 5) 옥산서원으로 중앙관료를 보내 노론의 대표 서원인, [[송시열]]을 주향하는 화양서원(華陽書院)의 사례에 준하여 치제하도록 명했다. 이후 1792년(정조 16)에도 치제를 명했으며, 1794년(정조 18)에는 옥산서원에서 빌려온 이언적의 <속대학혹문(續大學或問)>을 읽고 돌려보내면서, <회재선생 ‘속대학혹문’의 서문에 제하여(題先正晦齋續大學或問卷首)>라는 글을 직접 지어 옥산서원에 보내 이를 소장하게 하였다. 문묘 종사 대현을 주향하는 영남의 대표서원이자, [[세도정치]]에 대항할 정치적 동반자로서의 영남 남인의 구심점이라는 성격탓에 [[흥선대원군]]의 [[서원 철폐|서원 철폐령]]에도 훼철되지 않은 47개소 중 한 곳이다. == 구조 == === 역락문(亦樂門) === 옥산서원에 들어가기 위한 출입문. [[논어]]의 첫 부분 구절인 '벗이 먼 곳으로부터 오는 것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(有朋而自遠方來 不亦樂乎)'에서 따 지었다. 이는 [[도산서원]]의 역락서재와 같다. === 무변루(無邊樓) === 역락문을 들어서면 나오는 [[누각]]이며 올라가는 계단이 통나무를 깎아 만든 특이한 형태다. 공부하던 유생들의 휴식 공간이었다. 끝이 없는 누각이라는 의미인데 본래 이름은 납청루였으나 [[노수신]]이 '스승이 남긴 뜻에 맞지 않다'고 하여 [[주돈이]]의 '풍월무변(風月無邊)'을 따서 무변루로 고쳤다. 이곳의 현판은 [[한석봉]]의 글씨다. === 구인당(求仁堂) === 옥산서원에서 강의와 토론이 열렸던 [[강당]]. 서원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이다. 마루 양쪽의 양진재와 해립재는 교사들이 지내는 곳으로 현대 학교의 [[교무실]]에 해당한다. 강당 앞마당 좌우에는 공부하는 유생들이 기거하는 동재와 서재가 마주보고 있는데 동재 쪽에 더 나이가 많은 유생들이 지냈다고 한다. 구인당 정면에 걸려 있는 옥산서원 현판 글씨는 추사 [[김정희]]가 [[제주도]]로 [[유배]]되기 직전 54세에 쓴 글씨다. === 체인묘(體仁廟) === 이언적의 사당이다. 사당은 신성한 공간이므로 추가로 담장을 둘렀다. 보통 서원에서 제향을 하는 사당에는 사(祀)자를 쓰는데 여기는 이언적을 높게 쳐서, 왕이나 왕에 버금가는 정도로 좀 더 격이 높은 경우에 사용하는 글자인 묘(廟)를 쓰고 있다. === 민구재(敏求齋), 암수재(闇修齋) === 동·서재 기숙사이다. === 장판각(藏板閣) === === 전사청(典祀廳) === 체인묘 옆에 있는 제사에 사용하는 [[제기]]와 [[제구]]를 보관하는 건물. === 신도비(神道碑) === 체인묘 사당 왼쪽에 있는 이언적의 신도비 비석이다. 원래 서원 앞 계곡에 세웠는데 물이 불어나 훼손될 수 있다는 우려로 서원 안으로 옮겼다. == 관람 == 입장료는 없다. 관광도시로 유명한 경주시에 있지만 대부분의 경주 주요 관광지가 모여있는 동 지역에서는 거리가 꽤 있는 북부 [[안강읍]]에서도 서쪽 외곽지역에 있다. 옥산권으로 묶어서 바로 인근에 있는 [[이언적]]이 지은 사랑채인 독락당(보물 413호)[* 건물 옆쪽 담장에 좁은 나무로 살을 대어 대청마루에서 살창을 통해 앞 계곡의 흐르는 냇물을 바라볼 수 있는 특이한 구조의 조선시대 건축물이다. 옥산서원과 함께 양동마을의 일부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.], 통일신라시대의 특이한 석탑 [[정혜사지 십삼층석탑]](국보 40호)과 하나의 코스로 같이 관람하도록 안내되고 있다. 세 장소는 서로 도보이동이 가능할 만큼 가까이 있다. 가장 능역이 잘 보존된 [[신라왕릉]]인 [[흥덕왕릉]]도 비교적 가까운 곳에 있는 유적지지만 거기는 대중교통 접근은 거의 힘들고 자가용이 있다면 같이 방문할 만하다. 대중교통은 [[경주 버스 203]]이 있다. 자주 다니는 버스가 아니므로 시간표를 참고해야 한다. 203번은 [[양동마을]]을 먼저 거치고 옥산서원으로 향하므로 대중교통을 이용한다면 양동마을과 같이 일정에 넣는 게 낫다. [[분류:한국의 서원]] [[분류:대한민국의 사적]][[분류:한국의 역사마을: 하회와 양동]]