[[분류:1891년 출생]][[분류:1948년 사망]][[분류:독일제국군/군인]][[분류:슈츠슈타펠/인물]][[분류:제1차 세계 대전/군인]][[분류:제2차 세계 대전/군인]][[분류:전쟁범죄자/나치 독일]] [[파일:오토 라슈.jpg]] 오토 라슈 (Otto Rasch) [[1891년]] [[12월 7일]] 출생 - [[1948년]] [[11월 1일]] 사망 슐레스비히 홀슈타인 주의 프리드리히스루에 출신인 오토 라슈는 여러 대학에서 법학과 정치경제학, 철학을 공부하여 1912년에 마르부르크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1922년엔 라이프치히 대학으로부터 박사학위를 받았다. 2개의 박사학위를 받았기에 그는 <쌍박사 라슈>라고도 불리웠는데, 제 1차 세계 대전때 해군에 입대해 패전까지 중위로 복무했다. 패전 후 라이프치히에서 변호사를 개업한 라슈는 몇 개의 회사에서 고문을 맡았었다. 1931년 9월에 나치당에 입당해 1933년에 친위대에 입대한 그는 나치당의 정권장악 후에 라데베르크와 뷔텐부르크의 시장으로 일했다. 1938년부터는 프랑크푸르트의 [[게슈타포]] 장관이 되었다.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뒤엔 오버에스터라이히 주의 [[게슈타포]] 장관으로 일한 라슈는 1939년엔 체코 보호령의 친위대 장관이 되었다. 동시에 쾨니히스베르크의 친위대 지휘관 및 보안경찰장관도 겸무했다. 1940년 1월부터 2월에 걸쳐선 국가보안본부장인 [[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]]의 지시로 졸다우 강제수용소의 건설에도 종사했다. [[독소전쟁]]이 발발한 후, 1941년 6월부터 1941년 10월에 걸쳐 [[아인자츠그루펜]] C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라슈는 약 8만명의 유대인 및 소련군 포로를 살해했다고 보고했다. 또 1941년 9월 29일부터 30일엔 자신의 지휘하에 있던 부대가 키에프에서 33,771명의 유대인을 학살하기도 했다. 전후인 1947년 9월에 뉘른베르크 재판에 회부된 라슈는 심각한 건강상의 이유로 1948년 2월 5일에 재판에서 제외되었는데, 그 해 11월 1일에 사망했다.