[[분류:1917년 출생]][[분류:북청군 출신 인물]][[분류:한국계 중화민국의 공산주의자]][[분류:소련의 군인]][[분류:조선인민군 총참모장]][[분류:조선인민군 총정치국장]][[분류:인민무력부장]][[분류: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비서]][[분류:조선로동당 정치국 상무위원]][[분류:북한 국방위원회 부위원장]][[분류:1995년 사망]][[분류:대성산혁명렬사릉 안장자]] ||<-2><table align=right><table width=400><table bordercolor=#bc0021><bgcolor=#bc0021><tablebgcolor=#ffffff,#1f2024> 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; padding: 5px 10px; background-image: linear-gradient(to right, #9C001B, #BC0021 20%, #BC0021 80%, #9C001B)" {{{#ffffff '''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[br]{{{+1 오진우}}}[br]吳振宇 | O Jin-u'''}}}}}} || ||<-2> 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attachment/ojinuportrait_3.jpg|width=390]]}}} || ||<bgcolor=#bc0021> {{{#ffffff '''출생지'''}}} ||함경북도 북청군 || ||<bgcolor=#bc0021> {{{#ffffff '''생몰년도'''}}} ||[[1917년]] [[3월 9일]] ~ [[1995년]] [[2월 25일]]|| ||<bgcolor=#bc0021> {{{#ffffff '''국적'''}}} ||[[파일:북한 국기.svg|width=28]] [[북한]] || ||<bgcolor=#bc0021> {{{#ffffff '''최종계급'''}}} ||[[파일:1920px-Marshal_of_the_KPA_rank_insignia.svg.png|width=28]] [[원수(계급)|인민군원수]][* 본래는 김정일과 같은 계급인 공화국원수 였으나 김정일 신격화 작업으로 인해 인민군원수로 조정되었다.]|| ||<bgcolor=#bc0021> {{{#ffffff '''전직'''}}} ||조선인민군 총참모장, 총정치국장 || ||<bgcolor=#bc0021> {{{#ffffff '''정당'''}}} ||[include(틀:조선로동당)]|| [목차] [clearfix] == 개요 == [[북한]]의 [[군인]] 겸 [[정치인]]. 1980년대부터 [[김일성]], [[김정일]]에 이어 북한에서 3인자 격으로 군림했던 인물이다. == 생애 == [[함경남도]] [[북청군]]에서 가난한 [[농민]] 집안의 [[아들]]로 태어났고, 일찍부터 항일 [[빨치산]] 활동에 참가하면서 김일성을 만나 최측근이 되었다. 이후 [[일본 육군]]의 항일 무장 단체들에 대한 토벌 활동이 강화되자 김일성과 함께 [[소련]]으로 피난했고, [[소련군]]에 입대, [[육군]] [[하사관]]으로 복무했다. 당시에는 바쁜 김일성 부부를 대신해서 갓 태어난 [[김정일]]을 업어가며 키웠다고 하며, 이런 인연이 있어서인지 김정일 치하에서도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다. 광복 후 북한으로 돌아와 1946년 9월에 중앙보안간부학교 군사부교장으로 부임하면서 [[조선인민군]] 창군 작업에 참가했고, 육군 장령이 되어 [[한국전쟁]] 중에는 제43[[사단장]], 최고사령부 부[[참모장]], 제6군단 참모장, 근위서울제3사단장 등의 직책을 역임했다. 휴전 후에도 공군사령부 참모장[* 육군 출신인 오진우가 공군사령부에 근무한 것이 이상하게 보일 수 있지만, 전세계 어느 나라나 공군 창설 초기에는 육군 출신들이 주축을 이룬다. 예를 들어, 미국도 [[육군항공대]]가 공군으로 분리한 게 1947년 이지만, 정작 공군사관학교는 1954년에야 생겼고, 그 이후에도 한동안 육군 장교들을 충원하였다.], 총참모부 부참모장, 민족보위성(현 인민무력부) 부상, 김일성군사종합대학 총장 등 군 내 요직을 두루 거쳤고, 1956년부터는 [[조선로동당]] 당중앙위원회 후보위원으로 선출되면서 정치 경력도 쌓아갔다. 5년 뒤에는 당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승격되었고, 1967년에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장과 총참모장, 당중앙군사위원회 위원,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을 겸하며 군 경력의 정점에 올랐다. 이 시기까지만 해도 오진우는 김일성에게는 절대적인 충성을 맹세하고 있었다.[* 만화 김정은에서는 오진우가 김일성 앞에서 유일하게 맞담배를 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서술했다.] 후계자 문제와 관련하여 김정일의 경우 자신이 보모 역할까지 하면서 길렀음에도 제대로 된 군 경력이 없었다는 이유로 좀 더 군사적 능력이 있어 보이던 [[김평일]]에게 더 호의를 보이고 있었다. 하지만 이를 알아챈 김정일은 아버지의 신임을 받는 오진우를 제거하기보다는 자기 편으로 회유하려고 거액의 [[뇌물]]을 계속 건넸고[* 김정일은 오진우의 환심을 사기 위해 자신이 주최한 연회에 자주 그를 초대했는데, 어느 날 과음한 오진우가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중상을 입기도 하였다. 당시 김정일은 보고를 받고는 병원으로 즉각 달려 와서 의료진에게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치료할 것을 명령하고는 오진우를 회복시키는 데 성공할시 큰 포상을 약속했고, 오진우를 후송한 교통 순찰관에게도 크게 포상을 주었다. 나중에는 오진우를 외국으로 보내 좋은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배려하기도 했다.] 결국 김평일이 김정일의 정치 공작으로 권력을 잃은 뒤에는 친김정일 세력으로 돌아섰다. 이후 군부 내 보수 세력의 수장 역할을 하면서 [[오극렬]] 등 개혁 세력과 암암리에 권력 투쟁을 했는데, 1979년에 건강상의 이유로 오극렬에게 총참모장 직책을 내주면서 일시 후퇴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. 하지만 마찬가지로 김일성의 최측근이자 자신과 마찬가지로 빨치산 1세대였던 [[최현(북한)|최현]]과의 경쟁에서는 우위를 점했고, 1976년에 최현이 맡고 있던 인민무력부장 자리를 차지하면서 여전히 정치력에서 밀리지 않는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다. 1980년에는 정치국 상무위원이 되면서 김정일의 군부 장악을 도왔고, 그 공으로 1985년에 [[차수(계급)|차수]]로 진급했다. 이후 자신의 최대 라이벌 중 한 사람이었던 오극렬이 [[정치장교|정치위원]]의 권한 축소에 관한 문제로 김일성의 신임을 잃고 총참모장 직책을 [[갑툭튀]]한 원로인 [[최광]]에게 내주자, 최광과 함께 개혁파의 위세를 압도하면서 보수적인 정치 군인으로서 입지를 확고하게 다졌다. 1990년에 군부의 확실한 장악을 위해 김정일이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자리를 ~~스틸~~가져가고 1991년에는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에 부임하면서 입지가 어느 정도 약화되었지만, 1992년 4월에 북한 군 역사상 단 세 명밖에 없었던 (오진우, 최광, 리을설) 인민군 [[원수(계급)|원수]]에 가장 먼저 진급하는 등 말년에 가서도 여전히 강한 권력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었다.[* 2015년 11월에 마지막 인민군 원수였던 리을설이 사망한 뒤로도 이 계급에 오른 이는 한 동안 없었다가 2016년 4월 14일에 원로 차수들인 김영춘과 현철해가 동시에 진급했다.] 이후 김정일이 김일성으로부터 국방위원장 자리를 물려받자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에 임명되었다. 만약 조금 더 오래 살았다면 이후 김정일 시대에 [[조명록]]이 수행했던 역할을 이 양반이 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이미 그때가 70대 중반의 고령이긴 했다. 1994년에 김일성이 죽은 뒤에는 국가장의위원회 명단에도 이름을 올렸지만, 이 무렵부터 지병인 [[폐암]]이 악화되어 공식 석상에 등장하는 빈도가 현저히 떨어졌다. 김정일은 오진우를 특별히 [[프랑스]]로 보내 치료를 받게 했지만, 별다른 회복세를 보이지 못하고[* 대개의 암 말기 환자가 그렇듯 검진했더니 손을 쓸 수가 없을 정도까지 악화되어 있어서 그냥 되돌아 왔다고 한다.] 이듬해 평양에서 투병 중 사망했다. 장례는 김정일의 명령에 따라 국장으로 행해졌고, 유해는 [[대성산혁명렬사릉]]에 묻혔다. 전장에서는 정통 야전 지휘관보다는 참모 역할을 맡는 경우가 많았고, 그 솜씨도 그리 신통치 못해 [[나치 독일]] [[국방군]] 육군원수 [[빌헬름 카이텔]]이나 소련 육군원수 [[클리멘트 보로실로프]] 같은 [[똥별]]들에 비교하는 이들도 있다. 어차피 북한군 최고위급 대장이나 차수들은 나이가 나이다 보니 야전 지휘관이라기 보다는 그냥 군 원로직으로 보면 되니 크게 상관은 없겠지만. 대신 ~~후빨~~정치적 보신술은 [[만렙]] 수준이었는지 김일성 시절 행해진 수많은 [[숙청]]에서도 살아남았고, 김정일 조차도 자기 편으로 회유하려고 안간힘을 썼던 것을 보면 군인 보다는 전형적인 정치군인 타입의 인물로 여겨진다. 어쨌든 덕분에 김씨 가족 외에는 영웅화되기 힘든 북한에서[* 갑산파가 박금철 부부를 미화하다가 숙청되기도 했다.] 오진우의 일생을 다룬 [[영화]] 《백옥》이 사후에 제작되기도 했다. 이 영화의 시나리오가 잡지 《조선예술》에 실려 있는데, 내용이 아주 가관이다. 전장에서는 물론 김일성에 대한 충성심이 더 부각되기는 하지만 거의 [[게오르기 주코프]] 장군 수준의 명장으로 묘사되어 있고, 김일성이 죽은 뒤 골골 앓고 있을 때도 김정일이 최전방 시찰을 나갔다는 소식을 듣고 "장군님 곁으로 가고 싶다"면서 애써 몸을 일으켜 군복을 입고 차를 타고 가다가 도중에 죽는 등 [[손발퇴갤]]을 일으킬 정도. == 가족사항 == 아들인 [[오일정]]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[[중장|상장]]으로 군적을 유지하면서 조선로동당 당중앙위원회 군사부장을 역임하고 있다가 조직지도부 부부장으로 자리를 옮겼다. 2021년 [[조선로동당 제8차대회]]에서 정치국 위원에 선출되고 [[최부일]]이 맡았던 군정지도부장으로 승진했다. == 여담 == [[최은희·신상옥 납치사건|신상옥]] 감독의 증언에 의하면 오진우는 술에 취하면 장군님 명령만 있으면 부산까지 일주일이면 쓸어버린다고 호언장담하곤 했다 한다. -- 점심은 대전, 저녁은 부산에서?-- ~~점심은 평양, 저녁은 신의주 드립을 친 [[신성모]]가 생각나면 지는거다.~~ 또 [[음주운전]] 항목에도 있듯 북한에는 유독 고위 공직자들의 음주운전 사고가 빈발한데, 오진우 역시 음주운전을 하다가 사고를 내고 저승 문턱까지 다녀온 적이 있다고 한다. 김덕홍[* 북한의 정치인으로 1997년 황장엽과 함께 귀순했다.] 회고록에는 김정일이 1976년부터 1982년까진 오진우를 무력부장동지로, 1982년부터 1984년까지는 무력부장동무로, 1984년부터 1990년까진 오진우 영감으로, 1990년에서 1994년까진 오 영감으로, 1994년부터는 그냥 영감이라고 불렀다 한다.(...) 김덕홍은 이를 북한의 조선인민군이 김씨 일족의 사병으로 전락하는 모습을 상징하는 모습이라고 평했다. [[이한영]]의 회고에 따르면, 오진우가 김정일에게 자신의 손녀가 오스트리아에서 음악을 공부하고 싶으니 빈으로 유학을 가게 해달라고 사정한 적이 있었는데 김정일은 "영감, 자본주의 국가는 안돼요. 사회주의 국가로 하세요."라고 딱 잘라 거절해버렸다고 한다. 명색이 북한의 서열 3위니 뭐니 했지만 수령의 친족이 아닌 이상 딱 그 정도의 인물이었던 것이다. 정작 김정일은 소련에서 [[고르바초프]]가 집권한 걸 보고 소련을 달러에 굴복한 배신자 국가로 디스하면서 차라리 기개있는 자본주의 국가가 낫다는 이유로 모스크바 유학 중이던 [[김정남(북한)|김정남]]을 스위스로 옮겨버렸고 [[김정철]], [[김정은]]도 모두 스위스로 보냈다. 1948년 10월 22일 월북하여 [[강동정치학원]]을 거쳐 3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이후 6.25에 투입되 후에 지리산에서 빨치산 활동을 하다 붙잡힌 이영식의 수필 '빨치산'에서 그에 관한 일화가 하나 나온다. 당시 어린 소년이었던[* 초급중학교(당시의 중학교)도 졸업하기 전에 월북해서 상당히 어린 나이에 엘리트 코스를 밟은 케이스이다.] 그가 3군관학교에서 훈련을 받던 부소대장 시절, 자꾸 자기 소대에 사고가 발생하자 교장이었던 오진우가 직접 [[소원수리]]를 받으려고 문제가 있는지 간부들에게 물어봤지만 당연히 다른 간부들은 [[그런 거 없다]]를 시전(...) 그러나 ~~사회생활능력이 부족한~~ 이영식은 몇 가지 문제점의 개선을 요구했고, 당연히 오진우가 돌아간 다음 상관들에 의해 부하들 앞에서 공개 조리돌림을 당하며 큰 충격을 받고 부소대장실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울며 아침까지 버티고 있었다. 마침내 자초지종을 접한 오진우가 나타나 문을 열라고 한 뒤 해당 간부들을 전부 보직해임 시켜버리고 이영식을 그 자리에 앉힌다는 이야기가 나온다.[* 오진우의 말로는 인민군은 군법상 부하들에게 그들의 상급자를 비판하게 시킬 수 없다고 한다.] 모란봉클럽에 따르면 1992년 인민군 창건 60주년 행사 당시 김정일의 북한사람들이 기억하는 유일한 음성인 "'''영웅적 조선인민군 장병들에게 영광 있으라!'''"가 나오게 만든 장본인이라는 것이다. 당시 열병부대 순회 후 보고하는 자리에서 나이때문에 어지러운건지 아니면 숙취상태였는지 모르겠지만 최종보고할때 자꾸 더듬었다는 것이다. 이에 제 성질을 버티지 못한 김정일이 내질러버린 말이 바로 저 문장이라는 것.[[https://youtu.be/819JWGVL_Xo|영상]]