[[분류:제3대 국회의원]][[분류:제4대 국회의원]][[분류:무소속 국회의원]][[분류:자유당 국회의원]][[분류:1919년 출생]][[분류:1972년 사망]][[분류:안성시 출신 인물]] [include(틀:다른 뜻1, other1=개명한 야구선수, rd1=오주원, other2=독립운동가, rd2=오재영(독립운동가))] [include(틀:제5대 대통령 선거 후보)] [include(틀:제6대 대통령 선거 후보)] 吳在泳 1919년 7월 5일 ~ 1972년 9월 15일 (향년 53세) [[대한민국]]의 전 [[정치인]]이다. 1919년 [[경기도]] [[안성시|안성군]] 양성면 덕봉리에서 태어났다. 집안 형편상 양성공립보통학교 4학년 때 중퇴하고 [[한문]]을 공부하였다. 이후 서북신문, 건설신문 사장 및 전국문화사업협회 사무국장 등을 역임하였다. 1948년 [[대한국민당]]에 몸담아 중앙상무집행위원을 지냈다. 1950년 [[제2대 국회의원 선거]]에서 [[무소속]]으로 경기도 안성군 [[선거구]]에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[[이교선(1905)|이교선]]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. 이후 [[6.25 전쟁]] 때 종군학도대 후원회장을 역임하였다. 1954년 [[제3대 국회의원 선거]]에서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현역 국회의원인 [[자유당]] 이교선 후보에 설욕하고 당선되었다. 같은 해 자유당에 입당하였다. 1956년 [[대한민국 국회]] [[국방위원회]] 위원장에 선출되었다. 1958년 [[제4대 국회의원 선거]]에서 자유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. 1960년 [[제5대 국회의원 선거]]에서 자유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[[김갑수(법조인)|김갑수]]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. 게다가 1961년 [[3.15 부정선거]]에 가담하였다는 이유로 반민주행위자로 분류되어 공민권이 제한되고 피선거권이 상실되었다. [[5.16 군사정변]] 이후인 1963년 치러진 [[제5대 대통령 선거]]에서 추풍회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[[민주공화당]] [[박정희]]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. 같은 해 치러진 [[제6대 국회의원 선거]]에서도 추풍회 후보로 경기도 안성군-[[용인시|용인군]]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공화당 [[서상린]]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. 1967년 추풍회를 통한당으로 개칭하고 [[제6대 대통령 선거]]에서 통한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역시 현직 [[대한민국 대통령|대통령]]인 민주공화당 박정희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. 참고로 특이한 기록을 가지고 있는데 5, 6대 대통령 선거에서 모두 3위를 기록해 '''역대 최다(2번) 대선 3위'''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.