[include(틀:역대 조선 영의정(광해군-경종))] [목차] == 개요 == 吳允謙ㆍ1559년 ~ 1636년 [[조선]]의 [[문신]]. [[인조]] 때 [[영의정]]을 지냈다. [[황희]], [[맹사성]], [[류성룡]], [[이항복]]과 같이 조선의 5대 명재상 중 한명으로 '''꼽힌다..[[카더라]].''' 당대를 전후해도 [[오리]] [[이원익]], [[대동법]]의 [[김육]] 같은 명재상으로 꼽히는 이들이 있다. 다만 5대 재상이고 말것 없이 일반인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인지도에 비해서는 [[네임드]] 명재상이라 보면 되겠다.[* 굳이 따진다면 황희, 맹사성, 류성룡은 기본으로 들어가고 거기에 나머지 두 명을 채우는 형식이다. 이항복은 5번 재상을 역임한 점과 전쟁 때의 명재상으로서 손꼽히는 편이고, 이원익과 오윤겸은 성품이 원만하면서도 곧고 청렴하며 무당파였던 점, 김육은 [[대동법]]을 세운 점이 높이 평가된다. [[정조(조선)|정조]] 시대 [[채제공]]을 넣는 경우도 있으나 이건 [[남인]] 한정. 선조 초기의 재상인 [[이준경]]을 넣기도 한다. 그냥 애초에 다 좋은 분들이니 4대 5대 따질것 없이 좋은 점을 본받으면 될 일이다.] 대략 세대를 따지면 정철, 류성룡, 이원익(1547년) 세대보다는 조금 뒤고 이항복(1556년), [[이덕형]](1561년), [[정경세]], [[이수광]] (1563년) 세대에 속하였다. '''[[서인]]으로''' 우계(牛溪) [[성혼]](成渾)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과 덕행을 쌓아 수문(首門)이 되었다. == 생애 == 아버지는 [[쇄미록]]을 기록한 오희문이고, 어머니는 [[연안 이씨]]이다. 오윤겸은 다른 인재들에 비해 그다지 특출나진 않았다. 20대에 사마시에 급제했으나 36세의 늦은 나이에 [[전시]] [[문과]]에 [[급제]]했는데, 그것도 갑과 을과도 아닌 병과였다. 그 전에는 [[능참봉]]이나 [[송강]] [[정철]]의 [[종사관]] 같은 미관 말직에 종사했다. 그가 등과하는 1595년은 [[임진왜란]] 중이었고, 그와 동세대인 이항복과 이덕형은 이미 [[대사헌]]을 거쳐 [[참판]], [[판서]]를 다는 [[고위공무원|당상관]]이었다. 사실 오윤겸은 [[과거]] [[시험]]에 관심이 없었다. 그러나 아버지의 간절한 소망 때문에 과거 시험을 보기는 했는데 과거 시험 문제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응시하지 않고(...), 다 써 놓은 답안지에 다른 사람이 실수로(?) [[먹물]]을 쏟아도 [[대인배|화를 내지도 않았다]](...) --정말 욕심이 없었나보다.-- 그런데 [[평강군|평강]] [[현감]]으로 있을 때 우연히 문과에 응시해 급제했다(...) 야사에 따르면 정철(鄭澈)이 [[이산해]](李山海)에게 사윗감을 구해달라고 해서 오윤겸을 추천했더니, 이산해는 사위 이덕형(李德馨)과 같은 준재를 고르면서 정작 자신에게는 오윤겸과 같은 답답한 인간을 소개해주냐고 절교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. 그는 대인(待人) · 접물(接物)에 있어서 언제나 모가 나지 않았고, 자기 자신을 낮추고 남을 높여 겸허한 태도를 보였다. 보수적인 성격이지만 유화스럽게 상황을 이끌어나가 사람들에게 친밀감을 주었다. 그는 또한 류성룡의 제자 [[정경세]](鄭經世)와 함께 가장 경전에 밝은 사람으로 평가되기도 했다. 오윤겸의 벼슬 운은 전쟁이 지나고나서도 순탄치 않았다. 전후에도 [[북인]] 공세기는 지속되었고 이때 그는 성혼을 변호하다가 [[함경도]] [[경성군|경성]] [[판관]]으로 좌천되었으며[* [[영의정]]이었던 이항복도 이 일 때문에 물러났다.], [[평안도]] [[안주시|안주]] [[목사]], [[경상도]] [[동래]] [[부사]]를 전전해야했다. 오윤겸이 돌아온 것은 [[광해군]] 때(1610년)였지만, 당상관에 오른지 얼마 되지도 않아 문묘 배향 문제로 물러난다. [[조식(조선)|조식]]의 문하로 [[이언적]]과 [[이황]]의 [[문묘]] 배향을 반대하던 [[정인홍]]과 부딪쳤던 것이다.[* 정인홍이 좀 무리를 한것은 사실이다. 차라리 조식의 문묘 배향을 주장했으면 되었을 것을 괜히 이언적까지 몰아 공격하다가 명분을 많이 잃게 되었다.] 이에 [[강원도]] [[관찰사]]로 좌천되었다. --이거 뭔가 키워의 구석이 보이는데.-- 이후 1613년 계축 옥사로 [[인목대비]]의 지친들이 대거 잡혀들어가자 스스로 외직을 자처했다. 이렇게 지방관의 세월이 길다보니 이때의 업적이 더 많은데, 백성에게 인기가 많았고 세금을 줄여주거나 인사를 하는대 있어 청렴하게 수행하였다는 평을 받는 [[청백리]]였다. 이후 정3품으로 [[첨지중추부사]]에 임명되었고, 이 해 1617년(광해군 10년) '''[[조선 통신사]]'''로 다녀와 포로 송환에 기여했는데, 이때 '''풍랑으로 죽을 뻔 했고''', 북인의 득세가 계속되자 다시 물러났다가 1622년(광해군 14년)에 다시 [[명나라]] [[희종]] ([[명 4대 암군]]의 마지막인 [[천계제]])의 등극을 축하하러 명나라 사신으로 갔다 왔는데, 역시 해로로 갔다가 '''풍랑으로 또 죽을 뻔 했다.''' --[[생존왕]]-- 특징은 서인이지만 계속 북인 정권과 인목 대비 폐비에 반대하면서도 궂은 일은 도맡아 했다는 것. 이렇게 광해군 조정에서 오래 일한 경력에도 불구하고 1623년 [[인조반정]]이 일어나자 반정 공신이 아닌데도[* [[공서파]]가 아닌 [[청서파]]였다는 이야기다. 그 이전에 광해군 정권에 참여하기도 했고.] 정권의 [[이데올로기]]를 대변하는 [[대사헌]]에 임명되었다. --[[검찰총장]]이 됐다는 이야기다.-- 영의정이 된 이원익과 비슷한 케이스. 지조가 있었는지 선조 말 1601년, [[구사맹]][* 인조의 외조부](具思孟)이 그의 아들 구성[* 인조의 외삼촌](具宬)을 [[대사성]]에 임명하려 하는 것을 끝까지 반대했으며, 평소에 대소관료들에게 벼슬할 만한 사람들을 추천 받아 적재적소에 사람을 쓰니 인조조차도 자기가 쓰고자 하는 측근(잡류)들을 쓸 수가 없을 정도였다. 그제서야 외직과 사신을 전전하던 60대의 오윤겸에게 빛이 보이기 시작한다. 판서를 역임한건 물론이고, [[이괄의 난]]에서 왕을 [[공주시|공주]]까지 호송한 이후로 [[우의정]]에 오르더니, [[정묘호란]]에는 [[인목왕후|자전]]과 [[인열왕후|중전]]을 [[강화도]]로 호송했으며 기어이 [[좌의정]]을 거쳐 1628년 70세의 나이에 [[영의정]]에 올랐다. 인조가 추진하는 생부 [[정원군]](定遠君)의 [[원종(조선)|원종]][[추숭]](元宗追崇)을 반대했다. 사실 이건 [[이귀]] 빼곤 거의 모든 서인들이 ([[김류]]까지!) 반대했던거긴 하지만 여하간 할 소리는 하면서도 좌천 당하진 않았다. 오윤겸은 서인이었지만 당색을 초월했기에 그래서 오윤겸은 남인 같은 서인이요, [[이수광]](李睟光)은 서인 같은 남인이라는 말까지 생겼다. 오윤겸과 이수광은 폐모론에 반대하며 외직을 떠돌은 점, 그런 소수파였음에도 광해군 정권에 참여한 점[* [[지봉유설]]은 이때의 작품이다.], 이수광 역시 광해군 시절 명의 사신으로 [[마테오 리치]]와 자주 접했다는 점, 인조 반정 이후 [[대사간]](이수광) / 대사헌(이수광 - 오윤겸 - 이수광 역임) 콤비를 이뤘다는 점,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 때 같이 인조를 호송했다는 점 등 여러 비슷한 점이 많았다. 다만 이수광이 정묘호란 직후(1628년) 이조 판서의 자리에서 사망해 정승에는 이르지 못했다. [* 맏아들 이성구가 남인임에도 불구하고 영의정이 된걸 보면 아마 이수광이 장수했다면 정승이 되고 남았을 가능성이 높다. 이성구 역시 서인으로 분류되는 이항복의 송덕비를 북청 땅에 세워주어 북인의 미움을 사 유배된 전력이 있다.] 졸기에는 상황에 따라 어떻게 대처해야하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인물이었다고 평한다. 이후 좌의정을 역임하다가 [[병자호란]] 직전에 죽었다. 향년 77세. == 여담 == 오윤겸의 아버지와 조카도 역사에 이름을 남겼는데, 아버지는 조선 중기, 특히 임진왜란 당시의 민간인들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사료로 중요한 일기 [[쇄미록]] (보물 1096호)을 남긴 오희문이고, 조카는 [[병자호란]] 당시 [[삼학사]]의 한 사람인 [[오달제]](1609년 ~ 1637년)이다. 병조 좌랑, 부교리를 지내고 [[청나라]]에 끌려가 스물 여덟 나이에 (아버지가 죽은 다음해) 죽었다. 오달제는 이 공로로 훗날이긴 하지만 영의정(!!)에 추증되었고 겸하여 평생 벼슬을 하지 못했던 아버지 오희문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. --절개만 지키면 삼촌이랑 동급먹는 시스템.-- 국내 대하 드라마에서는 나오지 않고 일본 대하 드라마에서는 조선 통신사 종사관, 정사로서 등장한다. 예를 들어 2001년 NHK 대하 드라마 아오이 도쿠가와 산다이(접시꽃 도쿠가와 삼대) 34화 편에 쇄환사 겸 회답사 정사로서 나오며 40화에서는 국서(國書)에서 예조 참판 이름으로서 등장한다. [* 실제로는 드라마에 나온 국서에 표시된 예조 참판 오윤겸은 실제로는 작성 당시에 그는 예조 판서이었다.] 후손은 해주 오씨 추탄공파이며 관련 인물로는 영조 때 친 영조파 소론의 영수 [[오명항]], 현대에 와서는 [[오세훈]] 전 서울 시장이 있다. [[분류:영의정]][[분류:좌의정]][[분류:우의정]][[분류:예조판서]][[분류:서인]][[분류:조선/인물]][[분류:1559년 출생]][[분류:1636년 사망]]