[[분류: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]][[분류:한국의 독립운동가]][[분류:해주 오씨]][[분류:의성군 출신 인물]][[분류:1919년 출생]][[분류:1949년 사망]][[분류:건국훈장 애족장]][[분류:서울대학교 출신/전신 학교]] || 성명 ||오상흠(吳相欽) || || 일본식 성명 ||高山欽·高山欽藏 || || 본관 ||[[해주 오씨]] || || 생몰 ||[[1919년]] [[10월 13일]] ~ [[1949년]] [[5월 7일]] || || [[출생지]] ||[[경상북도]] [[의성군]] 남부면 도동동[br](현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도동리)[* [[해주 오씨]] 집성촌이다. 독립유공자 [[오병수]]도 이 마을 출신이다.] || || 사망지 ||[[경상북도]] [[의성군]] || || 추서 ||건국훈장 애족장 || [목차] == 개요 == 한국의 [[독립운동가]]. 200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. == 생애 == 오상흠은 1919년 10월 13일 경상북도 의성군 남부면 도동동에서 태어났다. 그는 1941년 3월 [[경성약학전문학교]]를 졸업한 뒤 동경도립석화학연구소(東京都立石化學硏究所)와 [[유한양행|유한제약주식회사]](柳韓製藥株式會社)에서 각각 근무하였다. 하지만 모종의 독립운동에 가담했다가 1942년 7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기소유예를 받고, 보호관찰을 받았다. 보호관찰이 풀린 후, 오상흠은 [[정문규]]로부터 독립운동에 사용될 폭탄을 제조하라는 권유를 받고 폭탄을 제조하려 하였으나, 재료를 구하지 못하여 실패하였다. 그러던 중 1944년 9월 15일경 경성약학전문학교 동창인 풍천일석(豊川一石)·고하인환(高河仁煥) 등과 경성 종로구 제동정 46번지에 소재한 풍천일석의 집에서 회합을 가졌다. 그는 이 회합에서 일제가 패망하면 유력한 단체에 의해 민족운동이 전개될 것이니, 여기에 우리 과학자들이 동참하여야 한다며 결속을 강조했다. 이 일이 발각되면서 체포된 그는 1945년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[[8.15 광복]] 직후 출소했다. 그러나 고문의 여독에 시달리다 1949년 5월 7일에 사망했다. 대한민국 정부는 2003년 오상흠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.