[[분류: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]][[분류:한국의 독립운동가]][[분류:대종교 신자]][[분류:해주 오씨]][[분류:강진군 출신 인물]][[분류:1863년 출생]][[분류:1916년 사망]][[분류:건국훈장 독립장]][[분류: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]] ||||<table align=right><bgcolor=white><:>[[파일:오기호.jpg|width=300px]] || || 성명 ||오기호(吳基鎬) || || 이명 ||오혁(吳赫) || || 자 / 호 ||경숙(景琡) / 손암(巽菴) || || 본관 ||[[해주 오씨]][* 시중공파 27세.] || || 생몰 ||[[1865년]] [[11월 18일]] ~ [[1916년]] [[12월 24일]] || || [[출생지]] ||[[전라도]] 강진현[br](현 [[전라남도]] [[강진군]] [[군동면]] 덕천리)[[http://www.nsori.com/news/articleView.html?idxno=5229|#]] || || 사망지 ||[[경성부]] 권농동 || || 매장지 ||[[국립대전현충원]] 독립유공자 묘역 || || 추서 ||건국훈장 독립장 || [목차] == 개요 == [[한국]]의 [[독립운동가]]. [[나철]]과 함께 [[대종교]]를 창시한 인물. 독립유공자 [[오원석(독립운동가)|오원석]]은 그의 장남이다. == 생애 == 1865년 11월 18일 전라도 강진현(현 [[전라남도]] [[강진군]] 군동면 덕천리)에서 아버지 오영환(吳英煥)과 어머니 [[경주 김씨]] 김달련(金達璉)의 딸 사이의 세 아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.[* 어머니 경주 김씨는 아버지의 둘째 부인인데, 첫째 부인인 [[창녕 조씨]] 조봉연(曺鳳淵)의 딸과의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다.] 30세 때인 1894년 [[한양]]으로 상경해 지사들을 사귀었고 1900년 [[궁내부]]주사(主事)를 역임했다. 그러다가 정국이 날로 혼란해지자 공직에서 물러나 나철, [[이기]](李沂) 등 지사들과 친교를 맺으면서 구국의 길을 도모했다. 1905년 [[러일전쟁]]이 종결된 후 나철과 함께 [[러시아]], [[일본]] 양국의 평화 협상 회담이 열리는 [[미국]] 포츠머스로 가서 조선의 독립 자주권을 보장받고자 했지만 일본 공사 [[하야시 곤스케]]의 방해로 미국에 가지 못했다. 그러자 나철, 이기 등과 의논해 일본 [[도쿄]]로 가서 일본 정계 인사들에게 글을 보내 조선의 독립을 보장하겠다는 약속을 지켜줄 것을 요청했다. 일제가 1905년 11월 [[을사조약]]을 강행하려 한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오기호는 나철과 연명으로 [[이토 히로부미]]와 메이지(明治) 일왕에게 각각 장문의 글을 보내 저지하려고 하였다. 이어 외무대신 [[박제순]](朴齊純)에게 급전을 보내 조약이 강제 체결되는 것을 막으려 하였지만 실패하여 을사조약은 강제 체결되었고 통감부(統監府)가 설치되었다. 오기호는 분노를 금치 못하고 귀국한 뒤 [[을사오적]]을 처단하기로 결심했다. 이후 '오적 암살단'을 결성한 그는 1906년 3월 25일 나철 등 여러 인사들과 함께 여러 곳에서 일제히 거사하여 을사오적을 동시에 처단하려 했다. 그러나 [[이홍래]], [[강원상]](康元相) 등이 사동(寺洞)에서 군부대신 [[권중현]](權重顯)을 습격하는데 그치고 많은 참가자들이 곤혹을 겪게 되었다. 이에 오기호는 [[나인영]], [[김인식]] 등과 함께 자현장(自現狀)을 가지고 평리원(平理院)에 나가 자수하여 모든 일은 자신들의 책임이고 다른 사람들은 죄가 없다고 주장하였다. 이후 그는 5년 [[유배]]형을 선고받고 지도(智島)에서 귀양살이를 하다가 사면을 받고 한성부로 돌아왔다. 1909년 나철과 함께 대종교를 창시한 후 대종교 포교에 의한 종교 보국 운동에 진력했으며 1916년 12월 24일 [[서울]] 권농동 우거(寓居)에서 사망했다. 그 전에 나철도 사망하였다.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으며 2010년 그의 유해를 [[국립대전현충원]]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.