[include(틀:조선의 별궁과 궁가)] ||<table width=500>[[파일:영희전 터.png|width=100%]]|| || 현재 영희전 터 자리. 물론 저 주황색 선이 전부 영역이었다는 건 아니다.[br]저 선 안 어딘가에 영희전이 있었다는 의미이다. || [목차] == 개요 == {{{+1 永禧殿}}} [[조선시대]] [[한성부]] 남부 훈도방, 지금의 [[서울특별시]] [[중구(서울)|중구]] [[수표로]] 27 (저동2가) 중부경찰서와 [[영락교회]] 일대에 있던 [[궁]]이다. [[세조(조선)|세조]]의 잠저[* [[공식]] [[후계자]]가 아닌 [[왕족]]이 [[왕]]이 되기 전에 살았던 [[집]].]이자 역대 [[왕]]들의 [[어진]]을 모셨던 진전(眞殿)이다. == 역사 == [[세조(조선)|세조]]는 [[세종대왕|세종]]과 [[소헌왕후]]의 [[차남|둘째 아들]]로, 1428년(세종 10년) [[정희왕후|윤번의 딸]]과 [[결혼|혼인]]하면서 궁을 나와 여기서 살았다. 그리고 [[의경세자]]와 [[예종(조선)|해양대군(예종)]]과 의숙공주를 여기서 낳았다. 그 후 [[계유정난|왕위를 찬탈한 세조]]가 [[가족]]과 함께 [[궁궐]]으로 들어가면서 빈 집이 되었다. 의숙공주가 [[결혼|혼인]]한 후 이 집을 공주 [[부부]]에게 내려주었고 한 동안 [[후손]]들이 소유하며 살았다가 [[중종(조선)|중종]] 때 한 때 [[단경왕후|폐비 신씨]]가 잠시 거처하기도 했다. === 이후 === 이후 [[선조(조선)|선조]]의 뒤를 이어 [[왕]]이 된 [[광해군]]은 [[대신]]들의 반대에도 1610년(광해군 2년) 어머니 [[공빈 김씨]]를 공성왕후(恭聖王后)로 [[추존]]했다. 그리고 기존의 의숙공주 집을 어머니의 [[사당]]으로 고쳐 [[신주]]를 모시고 ‘봉자전(奉慈殿)’이라 했다. 1615년(광해군 5년)에는 공성왕후의 [[신주]]를 [[종묘]]로 옮긴 뒤 이곳에 [[태조(조선)|태조]]와 [[세조(조선)|세조]]의 어진을 모시고 ‘남별전(南別殿)’이라 불렀다. [[인조반정]]으로 광해군이 쫓겨난 후 즉위한 [[인조]]는 친아버지 [[정원군|원종(정원군)]]의 [[영정]]을 남별전에 봉안하고 ‘숭은전(崇恩殿)’이라 했다. [[숙종(조선)|숙종]]은 [[전주시|전주]] [[경기전|경기전(慶基殿)]]에 있는 [[태조(조선)|태조]]의 [[영정]]을 베껴 그리게 한 뒤 이 곳에 봉안하고 ‘영희전(永禧殿)’으로 이름을 고쳤다. 그리고 입구에 [[홍살문]]을 두었고 홍살문 앞에는 하마비--[[하마|Hippo]]가 아니다--[* 下馬碑,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타고 가던 말에서 내리라는 글을 새긴 비석.]를 설치했다. 이 때부터 세조의 잠저는 영희전으로 불리게 되었고, [[설날|음력설]] · [[한식]] · [[단오]] · [[추석]] · [[동지]] · 납일[* [[조정]]과 민간에서 [[조상]]이나 [[종묘]][[사직]]에 [[제사]] 지내던 날. [[동지]]가 지난 후의 세 번째 미일(未日).]에 [[제사]]를 지냈다. 영희전에서 지내는 제사를 받들기 위해 [[왕]]은 1년에 여러 차례 [[창덕궁]]에서 [[수표교]]를 건너야 했는데, 이 때 숙종이 영희전을 참배하고 돌아오던 중 [[희빈 장씨]]를 만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한다. ||<table width=500>[[파일:2017-10-11 14-14-56.jpg|width=100%]]|| || 영희전 중수공사를 기록한 《진전중수도감도처의궤》 || 이후 [[영조]] 때 [[숙종(조선)|숙종]] [[어진]]을 봉안하였고 1748년(영조 24년) 크게 고쳐 지었다. 이후에도 [[정조(조선)|정조]] 때에는 영조 어진을, [[철종(조선)|철종]] 때에는 [[순조]] 어진을 모셨다. [[대한제국]] 시기 영희전 근처의 높은 지대, 현재 [[명동(서울)|명동]]인 명례방에 [[명동성당]] 건립이 완공되었다. 나라에서는 영희전의 현무봉[* [[집]]이나 [[묘]] 뒤의 작은 [[산]]으로 [[풍수]]에서는 이곳에 [[터]]의 기운이 뭉쳐 있다고 본다.]인 언덕에 [[천주교]] [[성당]]을 지으면 영희전의 기운이 파손됨을 우려해 영희전을 옮기려고 했다. 그러던 찰나에 [[사도세자]]가 [[장조]]로 [[추존]]되어 1900년([[광무]] 4년) [[종묘]]로 신위가 옮겨가자 기존의 사도세자 [[사당]]인 [[경모궁]]이 비면서 영희전을 경모궁 자리로 옮겼다. 그리고 빈 영희전에 [[영조]]의 잠저인 [[창의궁]]에 있던 [[정조(조선)|정조]]의 [[형]] [[의소세손]]의 [[사당]] ‘의소묘[* 이건하면서 영소묘로 바뀌었다.]’와 정조와 [[의빈 성씨]]의 [[장남]] [[문효세자]]의 사당 ‘문희묘’를 옮겨왔다. 그러나 8년 후인 1908년([[융희]] 2년) 7월에는 [[제사]]에 관한 칙령 제50호 ‘향사이정에 관한 안건(享祀釐正件)’에 따라 의소세손과 문효세자의 [[신주]]는 땅에 묻고, 영희전은 [[국가]] [[소유]]가 되었다. ||<table width=500>[[파일:dudgmlwjs qltjr.jpg|width=100%]]|| || 영희전 터 표지석. || 이후 옛 영희전 건물은 철거되었다. [[일제강점기]]에는 ‘[[경성부|경성]] 혼마치경찰서’가 세워졌고, [[8.15 광복]] 이후 ‘중부경찰서’가 되었으며, 1945년 [[한경직]] [[목사]]가 세운 ‘베다니전도교회’가 ‘[[영락교회]]’로 바뀌어 영역을 넓히면서 옛 모습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. == 여담 == * 이 일대가 유독 [[벼락]]이 잘 맞는 동네다. [[숙종(조선)|숙종]] 때인 1705년(숙종 31년) 4월 3일에 영희전 동쪽 [[담|담장]] 안에 있는 오래 된 [[버드나무]]에 [[새벽]]부터 [[아침]]까지 두 번이나 [[벼락]]이 쳐 근처에 있던 [[아이]]가 놀라 죽었고 [[영조]] 때인 1765년(영조 41년) 6월 11일엔 영희전 뜰 [[회화나무]]에 또 벼락이 쳐서 [[상처]]가 나자 아예 벼락 좀 그만 떨어지라고 [[제사]]까지 지냈다고 한다. [[분류:조선의 별궁과 궁가]][[분류:조선 시대의 없어진 건축물]]