||||<tablealign=center>[[파일:attachment/29_8.jpg]]|| ||<:> '''이름''' ||<(><white> '''염상섭(廉想涉)''' || ||<:> '''본명''' ||<(><white> 염상섭(廉尙燮) || ||<:> '''본관''' ||<(><white> [[염씨|파주 염씨]] || ||<:> '''출생''' ||<(><white> [[1897년]] [[8월 30일]] [br] [[조선]] [[한성부]] [[종로구|종로방]] [[적선동|적선정]] || ||<:> '''사망''' ||<(><white> [[1963년]] [[3월 14일]] [br] [[대한민국]] [[서울특별시]] [[성북구]] [[성북동(서울)|성북동]] || ||<:> '''학력''' ||<(><white> [[게이오기주쿠대학]] 사학과 || ||<:> '''종교''' ||<(><white> [[불교]] → [[천주교]] (세례명: 바오로) || ||<:> '''호''' ||<(><white> 제월(霽月)· 횡보(橫步) || ||<:> '''병역''' ||<(><white> [[대한민국 해군]] [[중령]] 전역 (정훈병과)|| [목차] == 소개 == [[대한민국]]의 [[소설가]]. 본관은 [[염(성씨)|파주]](坡州)[* 동정공파 22세손 '''섭(燮)''' 열(烈) 헌(憲) 항렬], 본명은 염상섭(廉尙燮), [[아호|호]]는 횡보(橫步). 횡보란 호를 가지게 된 데에는 두 가지 썰이 있다. 첫째는 항상 [[술]]에 취해 횡으로 걸어다녔기 때문이고, 둘째는 [[기행|괴이한 행동]]들을 많이 해서 횡보라는 호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. == 생애 == 1897년 현 [[서울특별시]] [[종로구]] [[사직동(서울)|체부동]] 인근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태어났다. 그의 조부 염인식(廉仁湜)은 [[중추원]] 의관[* 1901년 중추원의관에 임명됨[[http://sjw.history.go.kr/id/SJW-K38010060-00600|#]]. 1903년에는 영정모사도감 및 진전(眞殿: 임금의 [[어진]]을 봉안하고 제사지내는 건물)중건도감의 별간역 정3품에 임명되었다.[[http://sjw.history.go.kr/id/SJW-K38050240-01200|#]] [[http://sjw.history.go.kr/id/SJW-K38050240-01300|#]]]을 지냈고, 아버지 염규환(廉圭桓)은 구한말 군수였다. [[보성고등학교(서울)|보성고등보통학교]]를 수료한 후 1912년 [[일본]]으로 [[유학]]을 떠났다. 염상섭은 [[서울]]의 개명한, 즉 신식 문물에 밝은 집안에서 자라났기 때문에, 그 당시엔 드물게도 [[조혼]][* 당연히 본인의 뜻이 아니라, 부모와 집안의 강요로 이루어졌다. 그러다 보니 어른들이 정해 준 아내를 두고 본인이 좋아하는 여성과 바람을 피우는 일들이 많았다.]을 하지 않고 [[일본]]으로 유학을 떠났다. 결국 30대까지 [[총각]]이었다. 지금도 30대 중후반 넘어서까지 결혼을 못하면 그리 좋은 눈으로는 안 보는데, 그 때 시각에서 보자면 [[천연기념물]]에 가깝다. [[교토]] 제2부속 중학교를 졸업하고 [[게이오기주쿠대학]] 문과에 입학했으나, 1918년 병으로 자퇴한다. [[1919년]] 2월 8일, [[도쿄]] 조선 유학생 학우회가 주도한 도쿄 [[2.8 독립 선언]] 사건이 있은 뒤, 혼자서 [[오사카시|오사카]] [[텐노지]] 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한다. 계획적으로 진행됐던 도쿄 독립선언서와는 달리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발표한다. 물론 발표할 때에는 오사카에 거주하는 노동자와 유학생이 모였었다. 특이하게 독립선언 명의를 재오사카 한국노동자대표로 했다. 결국 [[일본제국 경찰]]에 잡히긴 하는데, 그 당시엔 독립선언을 불법으로 할 법규가 마련되어 있지 않아 [[쓰레기]](즉, [[전단지]]) 불법투기를 이유로 체포되었다. 이후 재판을 받았는데, 변호사를 대지 않고 직접 자기 변론을 하며 뛰어난 언변 실력을 보여 일본 [[판사]]가 염상섭을 꽤 귀여워했다고 한다. 재판정에 선 염상섭은 당시 일본치하에서 조선의 비참함과 현실을 호소했는데 방청객과 판사가 꽤나 감격했고, 이때 판사가 염상섭에게 변호사가 되기를 권하기까지 했다고 한다. 또한 일본 [[간수]]도 그를 귀여워해서, 출옥할 때 간수와 기념[[사진]]도 찍었다고 한다. 그 기록은 [[일본]] [[오사카]] 아사히 신문에서 찾아볼 수 있다. [[파일:hgjhglgljll.jpg|width=40%]] 1919년 [[3.1 운동]] 직후 검거돼 복역한 뒤 석방될 때 일본인 간수와 함께 기념사진을 촬영한 염상섭(가운데). 그 후, 그런 일이 이슈가 되어 귀국하고 [[동아일보]] 1기 특채 정치부 기자로 일한다. 월급도 후했고 전용 인력거까지 제공받았다고 한다. 그 후 [[동아일보]] 기자와 작가 생활을 하다가 일제 말엽에는 이런저런 이유로 절필하고 [[만주]]로 건너가 사업가로 성공한다. [[광복]] 후 만주의 재산을 정리해서 돌아왔는데, 당시 문학 단체에서 일한 경력으로 '''[[국민보도연맹]]'''에 가입하는 신세가 되었다. 이후 [[6.25 전쟁]]이 터지자 피난 생활을 하였다. 이 때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 <취우>. 말 그대로 전쟁도 한때의 소나기라는 이야기. 전쟁 자체의 묘사보다 점령지에서의 일상 생활을 밀도 있게 그렸다. [[6.25 전쟁]] 당시에는 [[대한민국 해군]] 정훈병과 [[소령]]으로 임관하고 [[중령]]으로 전역하였다. 전후 [[1954년]]에는 예술원회원에 선임되고, 서라벌예술대학(현 [[중앙대학교]] [[예술대학]])장을 역임하였다. 1963년 3월 14일 아침 [[성북동(서울)|성북동]] 자택에서 직장암으로 [[선종(가톨릭)|선종]]했다. 묘소는 [[서울특별시]] [[도봉구]] [[방학동]] [[천주교]] 묘지에 있다. [[종로]] [[교보문고]] 광화문점 앞에는 그를 기념하는 등신대 동상이 있다. 본래 이 동상은 종묘 앞에 위치해 있었으나 [[종묘]] 성역화 사업으로 삼청공원에 이전하였다가, [[2014년]] 4월 1일에 다시 이전하였다. == 창작 경향 == 한국 [[리얼리즘]] 소설의 성좌로 불릴 정도로, 당대 시대상을 이 작가만큼 세밀하게 다룬 작가는 드물다. 비견될 수 있는 사람은 [[박태원(소설가)|박태원]] 정도밖에 없다. 아무튼 이후 [[황석영]]으로 이어질 리얼리즘 소설의 한 계열을 열어젖힌 사람인 것은 분명하다. 심지어 지금도 평단의 보수적 인사가 현실 천착 소설 부족을 평할 때 그렇지 않은 전범으로 염두에 두는 것이 대개 이 작가이다. 또한 드물게도 [[서울]] 출신이어서, 염상섭의 작품에는 당대의 [[서울 사투리]]가 잘 나타나 있다. 따라서 그의 작품들은 언어적 측면에서도 가치가 높다. [[표본실의 청개구리]]라는 자연주의 작품으로 문단에 데뷔. 하지만 이 작품은 청개구리 해부경험이 없는 상태에서 집필한 것이라 [[고증]]이 어긋난다. 하지만 이 소설에서 청개구리 해부는 서술자의 상태를 묘사하기 위한 장면이므로 크게 문제가 되진 않는다. 염상섭의 대표작인 장편소설 [[삼대]]는 한국 현대 소설 중에서 최초의 가정 소설이라는 데서 의의가 있다. 고전소설로 가면 삼대와 구성이 같은 가정 소설이 [[완월회맹연]]이나 [[명주보월빙]] 등이 있었다. 하지만 그런 것들은 지금으로 치면 [[막장 드라마]]급이라는 것이 문제이지만. 또한, [[광복]] 이후에는 광복의 기쁨과 감격을 그린 소설 [[해방의 아들]]을 발표하였으며 영어가 득세하고 있는 현실을 반영한 [[양과자갑]], 인공치하 서울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[[취우]] 3편 연작이 있다. 그리고 1960년대에는 서민들에게서 [[일본]]의 존재를 대신한 [[미국]]을 나타낸 [[얼룩진 시대 풍경]]이라는 작품을 썼다. 또한, 현실을 상당히 잘 담아내는 동시에 지나치게 어두운 작품들을 많이 썼다. 밝은 분위기의 작품은 그야말로 손에 꼽을 정도이다. 염상섭의 작품 대부분이 한없이 어둡기만 한 이유에는, 그가 특정한 독자층을 노리고 그런 소설을 썼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. 아무튼 문학계에서는 여러 가지로 높이 평가받고 있지만, 지나치게 어둡고 내용도 어렵다는 특징 때문에 그를 싫어하는 독자들도 여럿 있다. == 친일 의혹 == 일제 말엽에서 절필한 것을 이유로 [[친일반민족행위자]] 문학가에는 들어가지 않지만, 친일 의혹이 있다. 개연성 수준까지 가면 의심스런 부분이 많다. 염상섭은 만몽일보와 이후 만몽일보와 간도일보가 합쳐져서 발행된 신문 만선일보의 편집자 겸 주필로 이름을 올리고 있었는데, 만몽일보는 일본이 만주 지역에서 대조선인용으로 찍어낸 기관지였다. 이 때 같이 이름을 올린 인물이 이 시기에는 이미 1급 친일파 소리를 듣고 있던 육당 [[최남선]], [[카프]] 활동으로 유명한 홍양명, 1910년대에는 잡지 학지광을 통해서 총독부가 감찰을 하였으나 1920년대에는 '''총독부가 끼니 걱정까지 해줄 정도'''로 자금 지원을 받은 진학문 등이다. 이에 대해서는 만주에서 순[[한글]]로 문학 활동 한다는 점에서 망명문학 운운하는 이들까지 존재했지만, 그 실체는 [[만주국]] 설치 과정에서 만주지역 한인들을 대상으로 일본에서 자본금까지 출자한 명실상부한 어용지이다. 또한 염상섭은 진학문이 최남선과 손잡으면서 창건한 잡지 동명에도 이름을 올리고 있다. 동명이나 그 후신인 시대일보가 총독부의 강요와 그로 인한 자금 압박으로 무너졌다는 주장도 있지만, 이 편집부에 일본인들이나 확실한 친일파들이 참여하였고 진국문과 당시 총독부 사이에서 자금 지원이 오간 기록, 최남선이 사이토 총독 측근인 아베에게 보낸 편지 등이 남아있는 등 택도 없는 이야기이다. 이것 역시 만선일보와 함께 명백한 친일의 증거는 아니지만 상당한 수준의 친일 개연성이기 때문에 여기 참여한 인물들에 대해서는 모두 친일 의혹이 존재한다. == 대표작 == * [[삼대]]: [[1947년]]에야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. * [[만세전]] : [[1924년]]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. * [[두 파산]] * [[표본실의 청개구리]]: 1924년 출간된 <견우화>라는 단편집에 수록되어 있다. 단편집을 구성하는 세 작품 <암야>, <표본실의 청개구리>, <제야>는 삼부작으로 엮여서 평가받는다. == 기타 작품 == * [[삼대]] * [[무화과(소설)|무화과]] * 백구: 삼대, 무화과를 잇는 3부작의 마지막 작품. 염상섭의 세계관을 완성시켰다는 평을 받는 3부작이지만 삼대에 가려져 무화과와 함께 아는 사람이 적다. 당장 이 [[문서]]에서도 두 작품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. * [[해방의 아들]] * [[취우]] * [[효풍]] * [[두 파산]] * [[양과자갑]] * [[얼룩진 시대 풍경]] * 전화 * 암야 * 제야 * 짖지 않는 개 * 채석장의 소년 : 의외로 저연령층을 상대로 한 소설이다. [[6.25 전쟁]]으로 연재가 중단되었다. * 임종 == 기타 == 말년에 이마 한쪽에 [[자두]]만한 큰 [[혹]]이 생긴 것으로 유명하다. 이 혹이 당시 유명해서였는지, 대부분 과거 학습서나 교과서에 실린 염상섭 사진이나 그림은 혹이 난 채로 환하게 웃는 사진이나 그림으로 많이 실려 있다.[[http://img.hani.co.kr/imgdb/resize/2015/1224/00065177801_20151224.JPG|참조사진]] 종양으로 보이긴 하나 생애 지장은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, 가족들이 "[[의사양반]]에게 찾아가 [[수술]]이라도 받아 보라"고 하였지만 그럴 때마다 "병원 갈 필요 없다"며 그냥 넘겼다는 말도 있다. 원래 [[불교]] 신자였으나 18세 쯤에 [[천주교]]로 [[개종]]했으며, [[세례명]]은 [[바오로]]이다. [[주당]]에 [[골초]]이기도 해서 하루에 [[담배]]를 피우는 데만 [[라이터]] 2개를 쓴 적도 있다고 한다. [[김동인]]의 단편 소설 [[발가락이 닮았다]]에서 문란한 성생활 끝에 결혼을 했지만 아내가 [[불륜]]을 저질러 자식을 낳았다는 주인공의 모델이라는 추측이 있다. [[나혜석]]과 친하게 지냈는데, 한때 나혜석을 흠모해서 그녀를 모델로 한 중편소설 해바라기(1923)을 쓰기도 했다. 관료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움 없이 살았지만, [[6.25 전쟁]] 이후에는 경제적으로 좀 어려웠다고 한다. 물론 전쟁 직후라 그런 점도 고려해야겠지만, 어쨌든 가난 탓에 죽을 때까지 월셋집에서 살았다고 한다. 염상섭과 함께 [[일제강점기]]에 활동했던 작가들 중에서 장편소설로서 성공한 경우가 생각보다 그렇게 많지는 않다. [[이광수(소설가)|이광수]]는 [[무정(소설)|무정]]이나 [[흙]], [[사랑]] 등이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지금 읽었을 땐 시원찮다는 평도 있다. [[김동인]]은 젊은 그들이나 운현궁의 봄 등 역사소설들이 인기를 얻었지만 문제작으로서의 성격은 약한 편이다. [[현진건]]은 무영탑을 제외하면 주목받는 장편이 별로 없다. [[이태준(소설가)|이태준]]이나 [[이효석]]은 장편을 여러 편 썼지만 역시 단편에서만 높은 평가를 받았다. [[김유정(소설가)|김유정]]과 [[이상(작가)|이상]]은 요절했다.('12월 12일'을 이상의 장편이라 볼 수 있겠으나 대표작은 아니다.) <백치 아다다>로 유명한 계용묵 역시 장편을 거의 안 썼다. 일제강점기에 장편소설로 높은 평가를 받은 대표적인 사례는 [[채만식]]의 [[태평천하]]와 [[탁류]], [[이기영(소설가)|이기영]]의 [[고향]], [[박태원(소설가)|박태원]]의 천변풍경 등이라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. [include(틀:문서 가져옴, this=문단, title=삼대, version=26)] [[분류:종로구 출신 인물]][[분류:1897년 출생]][[분류:파주 염씨]][[분류:1963년 사망]][[분류:대한민국의 소설가]][[분류:대한민국의 가톨릭 신자]][[분류:동아일보 관련 인물]][[분류:게이오기주쿠대학 출신]][[분류:직장암으로 죽은 인물]]