||<tablealign=right><tablewidth=350><table bordercolor=black><table bgcolor=#fff,#1F2023><colbgcolor=black><colcolor=gold> '''작위''' ||왕자(王子) || ||<width=70> '''성씨''' ||고(高) || || '''이름''' ||여율(如栗) / [[고여진|여진]](如津)(?)[* 진(津)을 율(律)의 오기로 볼 경우] / [[유리명왕|유류]](儒留) || || '''부친''' ||[[유리명왕]] / [[동명성왕]] || || '''생몰년''' ||불명 || [목차] [clearfix] == 개요 == [[고구려]]의 왕족. [[동명성왕]]의 아들 또는 [[유리명왕]]의 아들이다. [[위서(역사책)|위서]]에서는 [[대무신왕]]의 동생인 [[고여진]]과 동일인으로 비정되지만 [[북사]]에서는 [[유리명왕]]의 다른 표기이다. == 문헌에서의 등장 == [include(틀:역대 고구려 국왕)] >주몽(朱蒙)이 죽자 여달(閭達)이 대를 이어 즉위했다. 여달(閭達)이 죽자 아들 여율(如栗)이 대를 이어 즉위했다. 여율이 죽자 아들 막래(莫來)가 즉위하였고 이어 부여(夫餘)를 아울렀다. 막래의 자손이 계속 이어져 궁(宮)에 이르렀다. >朱蒙死 閭達代立. 閭達死 子如栗代立. 如栗死 子莫來立 乃并夫餘. 莫來子孫相傳, 至裔孫宮. >---- >'''《위서》'''[[http://db.history.go.kr/item/compareViewer.do?levelId=jo_009r_0010_0010_0070|링크]] ---- >주몽이 죽자 아들 여율(如栗)이 즉위했다. 여율이 죽자 아들 막래(莫來)가 즉위하였고 이어 부여(夫餘)를 아울렀다.(朱蒙死 子如栗立 如栗死 子莫來立乃并夫餘) >---- >'''《북사》''' [[위서(역사책)|위서]]에 의하면 여율은 여달(유리명왕)의 아들이자 막래(대무신왕?)의 아버지로 기록되어 있는 임금이다. 위의 기록을 살펴보면 [[대무신왕]]은 [[유리명왕]]의 뒤를 바로 이어 즉위한 것이 아니게 된다. 이에 대한 현재 학계의 통설은 노태돈 교수의 비정대로 막래를 대무신왕으로 해석하는 것인데, 막래을 모본의 오기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이 경우 두글자나 오기가 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힘드며, 모본왕과 민중왕 모두 실존이 확실한 상황에서 막래를 모본이라 보고 여율을 대무신왕으로 해석하면 민중왕이 짤리기 때문이다. 그렇게 되면 여율이 중간에 붕 뜨게 되는데, 이에 대해서는 유리왕의 후기 행적과 전기 행적, 삼국사기의 기사를 인용하여 유리 후반기의 치세가 사실 여율의 치세였으나 [[소수림왕|고구려 중기]] 국가의 시조가 태조왕에서 동명성왕으로 바뀌고 태조왕 이전 5대왕에 대한 역사가 정리되는 과정에서 유리왕의 치세로 통합되어 짤렸으리란 추측이다. 그렇다면 여율은 누구인가하는 문제가 있는데, 이에 대해선 유리의 자식 여진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. [include(틀:문서 가져옴, this=문단, title=대무신왕, version=244, paragraph=3)] [[분류:고구려의 왕자]]