[[분류: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]][[분류:한국의 독립운동가]][[분류:장로회 신자]][[분류:고성군(경상남도) 출신 인물]][[분류:1890년 출생]][[분류:1934년 사망]][[분류:건국훈장 애족장]][[분류: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]] ||||<table align=right><bgcolor=white><:>[[파일:여병섭.jpg|width=300px]] || || 성명 ||여병섭(呂柄燮) || || 이명 ||여해(呂海) || || 생몰 ||[[1890년]] [[8월 21일]] ~ [[1934년]] [[7월 27일]] || || [[출생지]] ||[[경상남도]] [[고성군(경상남도)|고성군]] 철성면 성내리 || || 사망지 ||[[경상남도]] [[고성군(경상남도)|고성군]] || || 매장지 ||[[국립대전현충원]] 독립유공자 묘역 || || 추서 ||건국훈장 애족장 || [목차] == 개요 == 한국의 [[독립운동가]].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. == 생애 == 여병섭은 1890년 8월 21일 경상남도 고성군 철성면 성내리에서 태어났다. 그는 평양신학교에 재학중이던 1917년 평양에서 조직된 조선국민회(朝鮮國民會)에 참가하여 경상도 구역장으로 활동하였다. 그러던 중 1918년 초 조선국민회의 조직이 발각됨으로써 피체되어 1918년 3월 16일 평양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. 이후 기독교 계통학교의 교사로 근무한 그는 1919년 10월 경상남도 진주에서 [[대한민국 임시정부]]에 대한 지원을 목적으로 주 광림학교(光林學校) 교사 [[홍수원]]·[[강우석(독립운동가)|강우석]] 등과 함께 비밀결사 혈성단(血誠團)을 조직하여 회원 모집과 군자금 모집활동을 전개하였다. 그러나 이러한 활동이 또다시 발각되면서 다시 옥고를 치러야 했다. 출옥 후, 여병섭은 [[장로회]] 장로로 활동하는 한편 동아일보 통영분국장·마산지국장 등을 지내면서 사회운동을 폭넓게 전개하였다. 그는 강연활동을 통하여 경남 일대의 청년회나 노동야학회의 설립과 활동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. 1920년 4월 거제군 기성청년회(岐城靑年會) 주최 강연회에서 <아반도(我半島) 청년의 사명(使命)>이란 주제로 강연을 행하였고, 동년 4월 고성청년회 주최의 강연회에서는 <현대와 노력>이란 제목의 연설을 수행하는 등 주로 청년의 의식 계몽에 역점을 두고 강연활동을 벌여 나갔다. 그는 1920년 12월 조선청년연합회(朝鮮靑年聯合會)의 창립총회가 서울 중앙 기독교청년회에서 열릴 때 마산청년회의 대표로 참석하여 창립총회의 의사(議事)에 선출되었고, 1922년 4월 3일 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. 1925년 4월, 여병섭은 조선노농총동맹(朝鮮勞農總同盟)이 결성될 때 중앙위원에 선출되어 노농운동에도 깊게 관여했다. 조선노농총동맹의 성립은 3·1운동 이후 질적 성장을 거듭한 농민운동의 결정체로써, 창립 당시 182개의 농민단체가 참여한 전국 규모의 농민운동단체였다. 또한 그는 1925년 4월 신문기자대회에서는 서기(書記)에 선출되었으며, [[신간회]] 창립 후 마산에서 지부 설치를 주도해 1927년 3월 마산지부가 설치되는 데 기여했다. 이후 1929년 신간회 복대표대회(復代表大會)가 열릴 때 마산구 대표로 선출되었으며, 1930년 3월 21일 신간회 마산지회의 서기장 겸 서무부장의 일을 맡아 신간회 마산지회의 실질적 책임자로 활약했다. 그 후 1934년 7월 27일 고성군에서 병사했다.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여병섭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. 그리고 2003년에 그의 유해를 [[국립대전현충원]]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.