[[분류:십자군 전쟁/관련인물]] [[분류:예루살렘 라틴 총대주교]] [목차] == 개요 == 에브르마르 드 테루안(Evremar de Thérouanne : ?년 ~ 1123년 이후)은 [[예루살렘 라틴 총대주교(예루살렘 왕국)|예루살렘 라틴 총대주교]]로 1102년부터 1105 또는 1107년까지 봉직했으며, 그 후 카이사레아(Caesarea)의 [[대주교]]로 1108년부터 1123년경까지 부임했다. == 생애 == 에브르마르는 [[프랑스]]의 테루안(Térouanne) 출신의 사제였으며, 노년기에 제1차 [[십자군]]과 성지로 갔다. 1102년에 예루살렘 총대주교였던 [[다임베르트 다 피사]]가 국왕 [[보두앵 1세]]가 지속적으로 제기한 여러 가지 부정행위와 범죄에 대한 혐의로 교황 사절인 파리의 [[추기경]] 로베르에 의해 면직되었고, 성지의 [[주교]]들은 경건함과 자애로운 평가를 받던 에브르마르를 후임으로 제안했고, 보두앵 1세가 동의하면서 총대주교로 선출되었다. 1104년, 보두앵 1세는 [[무슬림]] 주민들이 자신의 재산을 가지고 안전하게 떠날 수 있다고 약속하여 [[아크레]]의 항복을 받아냈지만, 당시 해군의 제노바 선원들은 그 약속을 무시하고 그들을 학살하고 약탈했다. 보두앵은 격노하여 제노바인들을 단죄하려 했지만 에브르마르는 그들의 사이에서 화해를 중재했다. 그 후 얼마 안 있어 왕국의 자파(Jaffa) 정복 원정에 참가하여, 보두앵 1세와 휘하 병사들에게 [[성 십자가]]와 함께 출정하게 하여 그들을 고무시켰으며, 원정에 도움이 되도록 스스로 병력을 모집했다. 같은 해에 다임베르트는 [[로마]]로 돌아가 항소했으며 [[교황]] [[파스칼 2세]]는 그를 복권시켰다. 그 후 파스칼 2세는 에브르마르를 다시 임명하려고 했지만 보두앵 1세는 1099년 다임베르트에게 밀려났던 [[아르눌 드 쇼크]]를 에브르마르의 대항마로 내세웠다. 결국 파스칼 2세는 아를의 대주교 [[기벨린 드 사브란]]을 교황 사절로 예루살렘에 파견하여 이 문제를 결정하도록 전권을 위임했다. 기벨린은 에브르마르가 예루살렘 총대주교의 직책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했고 그 직책을 공석으로 선언했다. 곧바로 보두앵은 기벨린을 예루살렘 총대주교로 제안했으며, 기벨린은 자리를 승낙한 후 에브르마르에게는 카이사레아(Caesarea)의 대주교 자리를 보상으로 받았다. 1119년 그는 다시 성 십자가와 함께 전장으로 나아가는 군대를 축복했다. 그는 1120년 나블루스 공의회에서 확정한 법령의 서명자였으며, 1123년에는 [[예루살렘 왕국]]과 [[베네치아 공화국]] 간의 무역협정이자 동맹조약인 Pactum Warmundi의 서명자였다. 에브르마르의 사망일은 알려져 있지 않다. [[가톨릭]] 백과사전(Catholic Encyclopedia)은 에브르마르가 [[교황]]의 비준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대립 총대주교(anti-patriarch)로 설명한다.