||||<tablealign=right><bgcolor=#ffffff><:>[[파일:external/upload.wikimedia.org/220px-Saint_Edith_Stein.jpg|width=300]] || ||||<bgcolor=#ffffff><:> '''에디트 슈타인''' || ||<:> '''출생''' ||<(> [[1891년]] [[10월 16일]], [[독일 제국]] 블레슬라우 || ||<:> '''사망''' ||<(> [[1942년]] [[8월 9일]], [[폴란드 총독부|나치독일 점령하 폴란드]] [[아우슈비츠]] [[수용소]] || [목차] [clearfix] ||[[라틴어]] : Teresia Benedicta a Cruce OCD (테레시아 베네딕타 아 크루체)[* '십자가의 테레시아 베네딕타'라는 뜻이다.]|| ||[[독일어]] : Edith Stein, Teresia Benedicta vom Kreuz|| == 개요 == [[유대인]] 출신의 [[가톨릭]] [[성녀]], [[순교자]]이자 [[가르멜 수도회]] [[수녀]]. 유럽의 [[수호성인]][* 성녀 에디트 슈타인, 성녀 [[시에나의 카타리나]], 성녀 비르지타.] 수도명은 십자가의 데레사 베네딕타. 수도생활을 통해 당시 박해로 인해 고통받고 있던 자신의 뿌리인 [[유대인]]과 깊이 연대하고자 했던 20세기의 [[성녀]]. 교회 역사상 [[유대인]]으로서는 처음 성인품에 오른 인물.[* 앞서 활동한 [[아빌라의 테레사]], [[십자가의 요한]], 천주의 성 요한(추정) 역시 [[유대인]] 혈통이다. 그러나 시성될 당시 사람들은 이들을 순수 [[스페인인]]으로 알고 있었기에, 에디트 슈타인이 유대인으로는 처음 성인품에 오른 인물이라 할 수있다. 물론 [[예수]]의 제자 등 성서 시대 유대 인물들은 제외한 얘기.] [[한나 아렌트]], 시몬느 베유, [[로자 룩셈부르크]]와 함께 세계 4대 유대인 여성 철학자. 출생 [[1891년]] [[10월 12일]] [[독일]] 브레슬라우. [[1942년]] [[8월 9일]] [[폴란드]] [[아우슈비츠]] [[수용소]]에서 선종. [[1987년]] [[5월 1일]], [[교황]] [[요한 바오로 2세]]에 의해 [[시복]]되었으며, [[1998년]] [[10월 11일]], 역시 [[교황]] [[요한 바오로 2세]]에 의해 [[시성]]되었다. 축일은 [[8월 9일]]. === 생애 === 성녀 에디트 슈타인은 [[1891년]] [[10월 12일]], 지금은 [[폴란드]] 땅이지만 당시에는 [[독일]] 영토였던 슐레지엔 지방의 중심도시 브레슬라우(오늘날의 브로츠와프)에서 태어났다. 마침 태어난 날이 [[이스라엘]]의 축일인 '속죄의 날(욤 키푸르)' 이었기에 철저한 유대교인이었던 모친은 이 우연의 일치를 아주 좋은 징조로 여겼다. 에디트 슈타인은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엄격한 어머니 밑에서 전통적인 [[유대교]] 신앙을 훈련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, 사춘기와 학생 시절에 무신론적인 지성인들과 가까이 지냈으며 인격적인 신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. 다른 형제들보다 영특했던 딸이 무신론자로 자람은 당시 어머니의 가장 큰 걱정이었다. [[독일]] 괴팅엔대학에서 심리학, 철학, 역사학, 독문학 등을 공부한 뒤 1916년 [[프라이부르크]]에서 [[후설]]의 지도로 박사학위를 받고 후설의 개인 조교[* 에디트 슈타인 후임 조교가 바로 [[하이데거]]이다.]가 되었다. 그 후 [[현상학]] 분야에서 독자적인 연구 활동을 하며 교수자격논문(하빌리타치온)을 제출한 뒤 교수가 되고자 노력하나, 당시 독일 학계에서 여성이 교수로 재직함은 거의 불가능했을 뿐 아니라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. 이후 대학 철학강사나 고등학교 교사로 일하며 생계를 유지한다. 이후 고향으로 돌아온 에디트 슈타인은 잠시 방문했던 친구 집에서 <성녀 [[아빌라의 테레사]] 자서전>을 읽고 깊이 감화되어, [[유다교]] 신앙을 버리고 [[가톨릭]]으로 개종을 결심한다.[* 아빌라의 테레사도 유다인 출신이었다. 보다 정확히는 할아버지 대에 유다교에서 천주교로 개종한 가문이었다.] [[1922년]] [[1월]] [[가톨릭]] [[세례성사]]를 받은 에디트 슈타인은 [[유다인]]을 박해하는 [[독일인]]과의 화해를 위한 길은 [[예수 그리스도]]의 [[십자가]]뿐이라는 믿음으로, [[1933년]] 42세 나이로 에디트는 어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[[쾰른]]의 [[가르멜 수도회|가르멜 수녀원]]에 입회해 하느님의 진리를 따르기 위해 스스로를 봉쇄하는 삶을 살기 시작한다.[* 에디트의 [[수도회]] 청원기와 수련기 생활은 고난으로 가득했다. 지금까지 쌓아왔던 자신의 학문적인 업적 대신 가장 막내 [[수도자]]로 지내면서 자신을 비워내야 했기 때문이었고, 다른 한편으로는 같은 청원기에 있던 18살의 어린 동료 청원자들과의 나이차 때문이었다고 한다.] 이듬해인 1934년에 ‘십자가의 데레사 베네딕타’[* ‘데레사’라는 이름은 성녀 데레사, ‘베네딕타’라는 이름은 그가 [[베네딕토회]]로부터 받은 영적 유산을 의미한다.]라는 수도명을 받는다. [[나치 독일]]의 유대인 박해가 심해지자 에디트는 언니 로자 슈타인[* 언니 역시 에디트의 세례 이후 [[가톨릭]]으로 [[개종]]한 뒤 [[수도회]] 일을 도왔다.]과 함께 [[네덜란드]]의 에히트 가르멜 수도원으로 도피하지만 1942년 8월 2일에 체포되고, [[폴란드]]의 [[아우슈비츠]] 수용소로 보내진다. 이미 [[가톨릭]]으로 개종했기에 더 이상 박해대상이 아니었지만, 유대인 태생으로서 같은 유대인과 함께 하겠다는 결심으로 수용소에서 인생의 마지막 시간을 보내던 중 8월 9일 가스실에서 살해되었다고 추정된다. 선종 이후 에디트 슈타인의 시복 시성 절차는 유례 없이 빠르게 진행되었고, [[요한 바오로 2세]] 교황에 의해 1987년 [[시복]], 1998년 [[시성]]되었다. 선종 당시 교황은 "그녀의 순교는 유럽사의 극적인 상징이자 [[그리스도교]]와 유대교를 잇는 화해의 가교"라고 말한 바 있다. 2006년 10월 11일, [[바티칸]] [[성 베드로 대성전]] 외벽의 벽감에 에디트 슈타인의 성상이 [[베네딕토 16세]] 교황의 축성을 받은 후 설치되었다. [[http://www.roma-antiqua.de/forum/galerie/data//500/medium/P1070339.JPG|사진]] === 학문적 업적 === 에디트 슈타인의 학문적 업적은 크게 현상학적 기여와 신학(특히 여성신학)의 부분으로 크게 나누어진다. === 기타 === 성녀 에디트 슈타인은 시복시성된 지 오래 지나지 않은 최근 성녀로, 한국에는 별로 유명하지 않다. 그러나 에티스 슈타인이 공부하고 일했던 [[독일]]에는 각 주마다 이름을 딴 고등학교[* 대부분 [[가톨릭]]계 [[사립학교]]이다.]가 존재하며 에디트 슈타인을 [[주보성인]]으로 모시는 성당도 많을 정도로 공경받고 있다. [[2000년대]] 이후 한국에서 세례받은 가톨릭 신자들은 에디트 슈타인을 [[수호성인]]으로 모시기도 하는데, 에디트 슈타인이라는 성인의 본명으로 세례를 받기도 하지만 수도명인 데레사 베네딕타 혹은 라틴어 이름인 테레시아로 받기도 한다. 미국 현상학회의 대모라 불리는 안나-테레지아 티미에니에츠카(Anna-Teresa Tymieniecka)가 에디트 슈타인의 제자다. [[1995년]]에 에디트의 삶을 다룬 영화 <7번방>이 제작되었다. 주인공인 에디트 역에는 역시 유태인이며, 훗날 [[패션 오브 크라이스트]]에서 [[성모 마리아]] 역으로 열연한 마야 모르겐슈테른이 출연했다. == 관련 문서 == * [[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]] : 에디트 슈타인처럼 아우슈비츠에서 선종한 가톨릭 순교자. 차이점이 있다면 콜베 신부는 [[유대인]]이 아니라 [[폴란드인]]이라 나치의 박해를 받았다. [[분류:가톨릭 성인]][[분류:독일의 근대 철학자]][[분류:독일의 가톨릭 수녀]][[분류:가톨릭 순교자]]