[[분류:프랑스 총리]] [[분류:1884년 출생]] [[분류:1970년 사망]] [[분류:프로방스알프코트다쥐르 출신 인물]] [[분류:급진적 자유주의자]] [include(틀:역대 프랑스 총리)] ||||<tablealign=right><:>[[파일:346px-Daladier_1924.jpg]]|| ||<:> '''풀네임''' ||'''Édouard Daladier''' (에두아르 달라디에) || ||<:> '''출신 정당''' ||급진당 (Parti radical) || ||<:> '''생물년''' ||[[1884년]] [[6월 18일]] ~ [[1970년]] [[10월 10일]] || ||<:> '''재임기간''' ||[[1933년]] [[1월 31일]] ~ [[1933년]] [[10월 26일]](1차) [[1934년]] [[1월 30일]] ~ [[1934년]] [[2월 9일]](2차) [[1938년]] [[4월 10일]] ~ [[1940년]] [[3월 21일]](3차) || 에두아르 달라디에는 [[프랑스 제3공화국]]의 총리로 1884년 프랑스 보클뤼즈 주, 카르팡트라에서 태어났다.[* 출신과 더불어 두꺼운 목과 넓은 어깨 때문에 달라디에는 '''보클뤼즈의 황소'''로 불렸다.] 리옹에서 에두아르 에리오[* 프랑스 제62대 총리]의 지도를 받고 역사학 교수가 되었고, 후에 그는 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으며, 중위까지 승진하고 [[레지옹 도뇌르]] 훈장을 수여 받았다. 그리고 1919년에 달라디에는 급진당에 입당, 보클뤼즈 주의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었다. 그리고 1924년에 은사인 에두아르 에리오 내각이 수립된 이래, 식민지장관·육군장관·교육장관·공공사업장관 등을 지냈고, 1933년 1월 처음으로 총리가 되었다. 같은 해 10월 자신의 내각이 붕괴된 뒤에도 후임 내각의 육군장관으로 유임하였다. 1934년 1월, 스타비스키 사건[* 1933년 12월 러시아 출생의 유대인 스타비스키(Stavisky, 1886∼1934)가 프랑스 서남부의 소도시 바욘에서 거짓말과 속임수로 많은 정재계 인사들 사이에서 거액의 뇌물을 수수하고, 그것으로 불량 채권을 발행하도록 하여 거액의 돈을 갈취한 사건이다. 당시 급진당 내각의 알베르 다리미에 사법장관이 이 사건에 연루되고, 파리 경시총감 장 키아프가 스타비스키의 도피를 도와준 사실이 드러나 정계의 부패를 비판하는 소리가 높았다. 파시스트 세력은 이 사건을 공화주의적 의회제도를 반대하는 데 이용, 급진당 내각을 맹렬히 공격하고 시위운동을 벌였다.]으로 인한 [[카미유 쇼탕]] 내각의 붕괴 이후, 두 번째로 총리가 되었으나, 역시 스타비스키 사건으로 인한 파시스트 세력의 압력을 받아 불과 11일 만에 퇴진하였다. 그 후로는 [[레옹 블룸]]과 함께 인민전선 결성에 힘썼고, 급진당과 공산당의 대립의 격화로 인해 1937년 인민전선 내각의 붕괴를 초래했는데 쇼탕, 블룸의 단기간 내각에 이어 달라디에는 1938년 4월 10일에 세 번째로 총리가 되었다. 평시 상황에서는 그럭저럭 괜찮은 지도자였지만, 전시상황에서는 '''[[뮌헨 협정]]이라는 성대한 오판을 저질러 대전 초기의 프랑스의 붕괴를 불러온 지도자'''라는 평가가 있다. 당시 영국과 프랑스는 [[제1차 세계 대전|대전쟁]]의 비극이 다시 발생하길 원하지 않았고, [[나치 독일]]과 최대한 외교를 통하여 평화적으로 해결하려는 성향이 강하였으며, 프랑스의 경우 대전쟁에서 징집 가능한 성인 인구의 20% 가량이 목숨을 잃었고 [[대공황]]으로 인하여 [[라인란트 재무장]] 사건부터 해서 [[뮌헨 협정|체코 합병]]까지 용인하게 된 것이다. 1939년 9월 1일 독일은 마침내 [[폴란드 제2공화국|폴란드]]를 [[폴란드 침공|침공]]했고, 이에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에게 선전포고 했지만 1차대전의 피해로 인해 독일을 치는 것은 주저하게 되어 달라디에는 프랑스군의 전면적인 개입은 자제했고, 이것은 [[가짜 전쟁]]으로 이어진다. 그 후 핀란드의 [[겨울전쟁]] 패배를 지원하지 못한 책임으로 물러나게 되지만 [[폴 레노]]의 요청으로 국방장관으로 임명된다. 그러나 [[프랑스 침공]] 당시 [[모리스 가믈랭]]의 무기력한 지휘로 프랑스군이 혼란에 빠지자 달라디에는 국방장관에서 파면되었다. 그 후 비시정권이 수립되자 모로코로 도피하려 했으나 중도에 사로잡혔고, 부헨발트 강제 수용소를 거쳐 오스트리아의 티롤 지방 이터 성에 수감되어 종전을 맞았다. [[이터성 전투]] 항목 참조. 프랑스가 해방된 뒤 [[필리프 페탱]] 원수의 재판에 증인으로 참석해 1940년 6월에 독일과의 휴전을 받아들일 수 밖에 다른 길이 없었다는 증언을 해 페탱에게 유리한 증언을 하기도 했다. 단, 1943년 영미 연합군이 프랑스령 북아프리카에 상륙한 후 [[독일 국방군]]이 자유지역인 남부 프랑스를 점령하게 허용한 페탱의 책임에 대해선 '프랑스군에게 독일군의 침입에 저항하라고 지시했어야 마땅했다'라고 답변했다. 그 후 국회의원과 [[아비뇽]]의 시장을 역임한 후 정계를 은퇴했다. 1970년 사망했고 [[페르 라세즈]] 묘지에 안장되었다.