[목차] [[http://www.heritage.go.kr/heri/cul/culSelectDetail.do?VdkVgwKey=23,00360000,23&pageNo=1_1_1_1#|양헌수 장군 승전비]] 梁憲洙 (1816~1888) == 개요 == [[조선]] 후기의 [[장군]]. 본관은 [[남원시|남원]], 호는 하거, 시호는 충장. [[병인양요]] 때 [[강화도]]에서 [[정족산성]] 전투를 지휘한 것으로 유명하다. == 병인양요 == 유학자 [[이항로]]의 [[제자]]이며 [[최익현]]하고 [[친구]]이다.[* 이항로는 3살 때 [[천자문]]을 뗐다고 한다. [[최승로]], [[이이(조선)|이이]] 등 [[천재]]라 불린 인물들은 천자문을 3살 때 뗐다.] 1848년 무과에 급제했고 선전관이 되었다. [[철종(조선)|철종]] 때는 참상으로 승진했고 이후 [[희천시|희천]]군수와 [[갑산군|갑산]]부사로 부임했다. 1865년 [[제주시|제주]]목사로 있었는데 [[탐관오리]] 백기호를 처벌해 백성들의 신망을 받았다. 1866년 [[강화군|강화부]] 정족산성 수성장 및 [[승정원]]의 동부승지로 있었다. 1866년 [[프랑스]]군이 [[강화도]]에 침략했는데 양헌수는 좌선봉장으로서 500여 명의 군사들을 이끌고 정족산성에 잠복했다. 양헌수는 조선군의 [[조총]]이 사거리와 총탄 수에서 프랑스군보다 [[무기]] 성능이 떨어졌기 때문에 성벽 뒤에 숨어 있다가 프랑스군이 성에 가까이 오면 집중 사격하는 [[전술]]을 택했는데 프랑스 [[해군]] 대령 올리비에와 일종의 [[게릴라]]전을 펼친 것이다. 그로 인해 조선의 기록에 따르면 프랑스군 6명이 죽고 30명이 부상당했다. 프랑스의 기록에는 3명이 죽고 35명 부상이라고 기록되어 있다.[* [[문수산성]]에서 [[한성근]]이 양헌수와 같은 전략으로 프랑스군이 27명의 사상자를 내게 만든다. 이 공으로 한성근 역시 양헌수처럼 출세가도를 달린다.] 양헌수는 병인양요 이후 출세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는데 [[서울특별시|한성]]판윤이 되고 [[황해도]] 병마절도사에 이어 어영대장이 된다. 그 뒤에는 [[형조판서]]와 [[공조판서]] 등 [[재상]]이 되는데 무관이 재상까지 오르는 일은 드문 사례다. 1876년에는 [[강화도 조약]]에 반대했는데 이걸로 보아 [[개화파]]는 아니고 보수적인 척화론자로 추정된다. 병인양요 때 [[서양]]과 싸우기는 했으나 [[외국]]과 개항하는 일에는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. [[제너럴 셔먼호 사건]] 때 [[미국]] 배를 물리친 [[박규수]]가 개화론자였던 것과 비교된다. 1887년 독련사로 천거되나 늙은 나이를 근거로 나아가지 않았다. 결국 1888년 11월 73세에 [[사망]]한다. 양헌수의 [[무덤]]은 [[경기도]] [[양평군]] 단월면 덕수리 산59-3에 있다. 양헌수의 신도비도 양평군에 있다. [[파일:external/img.yonhapnews.co.kr/PYH2013092601900001300_P2.jpg]] 2013년 서울특별시에서 양헌수의 '병인양요 일기'를 [[문화재]]로 지정했다. 양헌수 덕에 정족산성 안의 정족산 사고에 보관 중이던 [[조선왕조실록]]과 도서들이 약탈을 피할 수 있었다. 강화군에서 [[어재연]]과 같이 조선 후기에 서양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구한 [[영웅]]으로 평가받는다. 강화군은 어재연, 양헌수 장군에 대해 열심히 홍보하고 유적지를 정비한다. [[분류: 조선군/군인]][[분류:1816년 출생]][[분류:1888년 사망]][[분류:남원 양씨]]