[include(틀:역대 보편 칼리파)] [목차] == 개요 == {{{+1 على الله المتوكل }}} 알 무타와킬 알라 일라[* [[영어]] Al-Mutawakkil, 알라 (하나님)께 의지하는 자라는 뜻. 이건 왕호이고 원래 이름은 {{{+1 ابوالفض جعفر بن محمد المعتصم بالله }}} (아불 파들 자파르 이븐 무함마드 알 무으타심 빌라)이다. 따라서 본 이름은 자파르.] 재위 847년 8월 10일 ~ 861년 12월 10일 생몰 822년 3월 ~ 861년 12월 11일 [[아바스 왕조]]의 10대 칼리파. [[알 와티크|와티크]]의 친동생인 그는, 즉위하자마자 전대의 재상[* 특히 젊은 시절 칼리파 앞에서 자주 그를 모욕하던 알 자이야트. (847년 9월 22일 체포, 곧 고문사). 이후 자이야트를 제거하는데 공을 세우며 권력이 커진 튀르크 장군 이크타는 848년에 그가 핫지 (성지순례)를 다녀오던 때에 체포하여 감금하였다. 이크타의 집에선 금화 디나르 백만 닢이 발견되었고 그는 849년 12월에 옥에서 굶어죽었다.]과 사마라의 군사령관을 처형하였고, 튀르크 용병대의 활약으로 850년대에 일어난 4번의 반란[* 아르메니아 총독의 반란 (851 ~ 852년), 1차 & 2차 홈스 반란 (854, 855년), 상 이집트 베자 인들의 반란 (856년)]을 진압하였다. 그의 치세에 [[사마라|사마라의 대모스크]]가 건립되었고, 마문 치세 말부터 설치되었던 종교 재판 (미흐나)를 20여년 만에 폐지하였다. 무타와킬은, 튀르크 군 사령관들의 세력을 견제하여 몇명을 처형하였는데, 이에 장남 문타시르와 튀르크 경호원들이 합심하여 그를 살해하였다. (861년 12월) 그는 와지르의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 국정을 운영한 몇 안되는 아바스 조의 [[칼리파]]이다. 또한, 아바스 조의 전성기를 누린 마지막 군주이다. 그러나 후계자 문제를 두고 장남 알 문타시르 대신 차남 알 무타즈를 지원하다가 문타시르를 지지하던 튀르크 대신들에게 살해되었다. 그의 사후 사마라는 혼란에 빠지며, 사마라의 무정부 상태 (861 ~ 870년) 시대가 도래하며, 지역 [[에미르]]들에 대한 통제가 약해진다. 861년을 기점으로, 이슬람 사에서는 본격적인 [[중세]] 혼란기가 시작된다. == 종교 정책 == 무타와킬은 선대 칼리파들의 종교적 관용 정책을 페기하였고 동시에 이성을 강조하였던 [[무으타질라]] 파에 대한 지원도 자제하였다. 그는 무타질라에 대한 비판으로 [[알 마문]]에 의해 투옥된 [[한발리]] 파의 개창자 아흐마드 이븐 한발을 석방하였고 850년에는 유대인과 그리스도교인들은 무슬림들과 구별되는 노란 의상을 입을 것을 명하였다. 다만 이때까지만 해도 중동에서 무슬림은 다수가 아니던 때라 제대로 시행된 것 같지는 않다. 또한 스스로 예언자임을 칭하던 무함마드 이븐 알 파라즈를 같은해 6월 18일에 처형하였다. 시아파에 대한 탄압도 재개되어 열두이맘파의 10번째인 알리 알 하디를 사마라로 소환하여 가택 연금을 시켰다. 무타와킬의 치세에 압바스 조는 수니 이슬람으로 확실히 돌아섰다.[* 그외에 키릴 문자를 만들어 유명한 수사 키릴이 동로마 사절로 사마라에 파견되어 그와 면담하였다고 한다.] == 건설광 == [[파일:1520263944170361300.jpg]] 이라크 사마라의 마스지드 유적과 말위야 미나레트 [[파일:사마라.유적.png]] 대 모스크 일대. 시내 남부에도 발굴 조사가 한창이다. ||[[파일:1003px-Abbasid_Samarra_Map.svg.png|width=270]]||[[파일:사마라.궁전.png|width=740]]|| 사마라 시내 북쪽의 궁전 유적 무타와킬은 15년의 치세 동안 수도인 [[사마라(이라크)|사마라]] 일대에 많은 건축물을 남겼다. 그중 대표작은 848 ~ 852년에 걸쳐 완성된 대 모스크 (마스지드)인데, 무려 17개의 회랑을 갖춘 당대 최대 규모의 사원이었다. 또한 나선형의 말위야 (ملوية)[* 아랍어로 뱀의 똬리 혹은 뒤틀린 이란 뜻이다] 미나렛은 52m의 높이를 자랑하며 당대 서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. 그외에도 무타와킬은 사마라에 20여개의 궁전을 세웠고 도시를 북쪽으로 확장시켰다. 9세기 중반 무렵 사마라는 바그다드, 콘스탄티노폴리스, 장안 등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였다.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사마라의 유적지구 넓이만 1만 5천 헥타르가 넘는데 그 대부분이 무타와킬 시대에 지어졌다. 그의 치세동안 사마라 일대의 건축에 들어간 예산만 무려 2억 디르함을 넘었다 한다. 859년부터 무타와킬은 사마라 시내에서 북쪽으로 15 km 가량 떨어진 옛 아시리아 ~ 페르시아 도시 유적 인근에 알 자파리야[* 무타와킬의 본명은 자파르이다]라는 신도시를 세우기 시작하였다. 우선적으로 세워진 아부 둘라프 모스크 (جامع أبو دلف)는 사마라 대모스크에 버금가는 규모를 자랑한다. 두 사원의 넓이는 각각 5만 제곱미터에 이른다. 또한 둘다 높은 나선형의 미나렛이 특징인데 둘라프의 미나렛은 33m 로 말위야의 축소판이다. 자파리야의 운하 건설은 유대계 기술자인 신드 이븐 알리가 맡았다. 860년경 무타와킬은 [[조로아스터교]]에서 신성히 여기는 천년이 넘은 측백나무를 베어 자신의 궁전 기둥으로 쓰이게 하였다. 다만 무타와킬은 해당 목재가 사마라에 도착하기 전에 암살당하며 조로아스터의 저주가 내린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. [[분류:아바스 칼리파]]