[include(틀:역대 시아파 이맘)] [include(틀:역대 파티마 칼리파)] ||<|2> [[아랍어]] || {{{+1 أبو القاسم أحمد المستعلي بالله }}} || || 아불 카심 아흐마드 알 무스탈리 빌라 || || [[영어]] || Abu'l-Qasim Ahmad al-Musta'li Billah || 재위 1094년 12월 29일 ~ 1101년 12월 12일 생몰 1074년 9월 16일 ~ 1101년 12월 12일 [목차] == 개요 == 파티마 왕조의 9대 칼리파. [[알 무스탄시르]]의 아들로, 형들이 있었음에도 당시 실권자였던 바드르 알 자말리의 사위인 이유로 군부에 의해 추대되었다. 후세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곧은 성격을 지녔다고 한다. 다만 치세 내내 실권은 바드르의 아들 알 아흐달 샤한샤가 쥐고 있었고 이에 알 무스탈리는 종교 활동, 그 중에서도 다와 (선교)에 열중하여 그의 치세에 이스마일파 포교는 활기를 띠었다. 특히 예멘 지방의 술라이히 왕조와의 교류가 많았다. 비교적 어리다는 이유로 칼리파로 옹립된 그는 27세로 요절하였고 5세 아들 알 아미르가 계승한다. 이는 후기 파티마 칼리파들의 특징이 된다. == 치세 == 바드르의 딸 시트 알 물크와의 결혼은 알 무스탄시르 사망 직전에 치러졌다. 무스탈리파에 의하면 결혼식 연회에서 알 무스탄시르가 아흐마드를 후계자로 지목했거나 알 무스탄시르가 임종 시에 누이에게 아흐마드의 후계자 지목을 유언하였다고도 하지만 이는 정당화를 위해 후세에 만들어진 이야기일 가능성이 있다. 알 무스탈리의 즉위 직후 와지르 알 아흐달은 니자르, 압둘라, 이스마일 등 그의 형들을 왕궁으로 소환해 신임 칼리파에 복종을 표하도록 요구하였지만 그들은 각각 자신이 부왕에 의해 후계자로 지목되었다며 거부하였다. 예상치 못한 반발에 알 아흐달은 당황하였고 그 틈에 형제들은 왕궁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. 압둘라와 이스마일은 인근 모스크로, 큰 형 니자르는 카이로를 빠져나갔다. === 니자르의 반란 (1095년) === 그외에도 카이로의 최고 다이[* 이스마일파 고위 성직자] 바라카트가 압둘라를 칼리파 '알 무와파크'로 선포하는 등 혼선이 이어졌다. 알 아흐달은 우선 바라카트를 체포하였고[* 이후 처형됨] 압둘라와 이스마일은 연금되었다가 결국 알 무스탈리를 승인하였다. 이후 알 아흐달은 정부 관료들을 모아 의회를 열었고 알 무스탈리는 별 이견 없이 이맘-칼리파로 선포되었다. 한편 카이로를 빠져나간 니자르는 알렉산드리아로 향하여 현지 총독(나스르 앗 다울라 아프타킨), 카디 및 여론의 지지를 받아 칼리파 알 무스타파 리 딘 알라로 칭하였다. 2월, 알 아흐달은 알렉산드리아를 공격했으나 패하였고 오히려 니자르의 군대가 반격에 나서 카이로 외곽을 습격하였다. 몇달간 군대를 정비하고 아랍 부족들에 뇌물과 선물을 주어 동맹을 맺은 알 아흐달은 마침내 니자르를 격퇴하고 알렉산드리아를 포위하였다. 몇달 간 이어진 포위 끝에 1095년 11월, 니자르의 심복이었던 베르베르인 이븐 마살이 남은 보물을 챙겨 도시를 탈출하였고 이에 병사들의 급료로 줄 여력이 없어진 니자르는 안전 보장 (아만) 조건으로 항복하였다. 카이로로 연행된 알렉산드리아 총독 아프타킨은 처형되었고 니자르는 종신 연금에 처해졌다.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서아시아 일대의 이스마일파는 이로써 분열되었다. 이집트, 시리아, 예멘 등 서부 이슬람권에는 칼리파 알 무스탈리를 지지하는 무스탈리파가 자리잡았고 이란, 이라크 등 동부 이슬람권은 니자르를 정통 이맘으로 인정하는 니자리파가 득세하였던 것이다. 후자는 알라무트의 [[하산 에 사바흐]] 하에 통합되어 [[아사신]]으로 발전하였고 결국 그의 후손들이 이맘이 된다. 한편 후세인, 무함마드, 이스마일, 타히르 등의 다른 왕자들도 마그레브로 망명해 정통성을 주장하였고 니자르의 후손들은 1162년까지 3대에 걸쳐 파티마 조의 불온 세력으로 남았다. === 십자군의 당도 === 실권자 알 아흐달은 뛰어난 행정가였고 부친에 이어 안정적으로 이집트를 통치하였다. 한편 [[말리크샤]] 사후 시리아는 혼란에 빠졌고 1096년 [[아파메아]]가 파티마 조에 복속해왔다. 비록 다마스쿠스의 두카크에 대항하여 알레포의 리드완과의 동맹 체결은 실패하였지만 알 아흐달은 티레를 수복하였다. (1097년) 그리고 십자군이 초래한 혼란을 틈타 1098년 8월엔 한달의 포위 끝에 예루살렘을 되찾는데 성공, 약 30년만에 팔레스타인 지방에 대한 파티마 조의 지배를 회복한다. 동시에 알 아흐달은 안티오크에 당도한 십자군이 대셀주크 동맹을 제의했으나 거절되었고, 1년도 안되어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점령해버리며 팔레스타인의 패권을 앗아갔다. 십자군을 단순히 동로마측 용병 집단으로만 생각하던 알 아흐달은 당황하여 예루살렘에 원군을 파견했으나 1099년 8월 아스칼론 전투에서 [[고드프루아]]가 이끄는 십자군의 기습에 대패하였다. 이로써 [[예루살렘 왕국]]의 존립이 확실시 되었다. 패전 후 알 아흐달은 혼비백산하여 아스칼론도 포기하고 이집트로 도주하였는데 십자군이 내분으로 철수하자 그곳을 요새화 하고 대십자군 요새로 삼았다. 그러던 1101년 9월 베이루트 총독 사드 앗 다울라 휘하의 파티마 군대가 예루살렘을 향하였으나 1차 라말라 전투에서 격전 끝에 재차 패하였다. 한편 십자군을 피해 많은 난민들이 시리아에서 몰려왔는데, 1099-1100년 이집트에 흉작이 들어 정부의 부담이 가중되었다. == 죽음 == 십자군이 자리를 잡아가던 1101년 12월 알 무스탈리는 사망하였다. 이후 그의 5세 아들 알 아미르가 계승하였고 알 아흐달의 권력은 더욱 강화되었다. 한편 20여년 후 하산 에 사바흐의 아사신은 알 아흐달과 알 아미르를 차례대로 암살하며 니자르에 대한 복수를 이룬다. [[분류:파티마 칼리파]][[분류:십자군 전쟁/관련인물]]