[[분류: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]][[분류:한국의 독립운동가]][[분류:건국훈장 독립장]][[분류:순흥 안씨]][[분류:안주시 출신 인물]][[분류:1898년 출생]][[분류:1977년 사망]][[분류:실향민]] ||<-2><table align=right><bgcolor=white> [[파일:안재환(독립운동가).jpg|width=300]] || || 성명 ||안재환(安載煥) || || 이명 ||안지청(安志靑)·안동만(安東滿, 安東晩)[br]안지만(安池滿)·안봉천(安鳳天)·왕여남(王汝南) || || 본관 ||[[순흥 안씨]] || || 생몰 ||[[1898년]] [[11월 25일]] ~ [[1977년]] [[5월 11일]] || || [[출생지]] ||[[평안남도]] [[안주시|안주군]] 문곡면 동칠리[* 구한 말, 안주군 문곡방 동칠리 → 1896년 안주군 문곡면 동칠리 → 1914년 [[부군면 통폐합]], 안주군 신안주면 동칠리 → 1952년 [[군면리 대폐합]], 안주군 운송리.][* 인근의 신원리·용운리·운송리·청송리와 함께 [[순흥 안씨]] 집성촌이다.][* [[http://e-gonghun.mpva.go.kr/user/ContribuReportDetail.do?goTocode=20001&mngNo=3140|독립유공자 공적조서]]에는 본적지가 신안주면 원흥리로 등재되어 있는데, [[http://db.history.go.kr/id/im_108_10050|용의조선인명부]]에는 신안주면 동칠리로 기재되어 있다.][br](현 평안남도 [[안주시]] 운송리) || || 수여 ||건국훈장 독립장 || [목차] == 개요 == 한국의 [[독립운동가]].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. == 생애 == 안재환은 1898년 11월 25일 평안남도 안주군 문곡면 동칠리(현 안주시 운송리)에서 태어났다. 그는 일찍이 [[중화민국]]으로 망명하여 [[황포군관학교]] [[우한]]분교에 입학한 후 훈련을 받았으며, 1924년 9월 [[박은식]]의 양자인 같은 학교 학생 [[박시창]]·송욱동(宋旭東) 등 몇 명 및 [[국민혁명군]]의 기술교관으로 있던 백득림(白得林) 등과 같이 [[우한시|우창]](武昌)에서 우한한인혁명청년회(武漢韓人革命靑年會)를 조직하여 동지 훈련과 광복운동 선전에 심혈을 기울였다. 1927년 2월 그는 [[유자명]]·[[신공제]]·[[김규식]] 등과 손잡고 중국인, [[베트남]]인, 인도인 등과 [[난징]]에서 연합하여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(東方被壓迫民族聯合會)를 조직하고 김규식을 동 연합회의 회장으로 추대하였다. 여기서 그는 한국부 상무(韓國部常務)로 활약하다가 기관지 「동방민족(東方民族)」을 한·중·영문(韓中英文)으로 발간하여 민족독립의 당위성 및 절박함을 호소하였다. 1929년에는 난징에서 [[민병길]]·[[신익희]]·[[김홍일]] 등 10여 명과 [[한국혁명당]]을 조직, 활동하였다. 이어 그는 무력행동단체로 철혈단(鐵血團)을 조직하고 그 단장이 되었으며, [[나월환]] 등 10여 명을 중견 단원으로 하고 기관지 「우리길」을 발간,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. 1933년 난징에서 김규식이 [[김두봉]]·신익희·[[최동오(독립운동가)|최동오]] 등과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(韓國對日戰線統一同盟)을 결성할 때 그는 남경한교회(南京韓僑會) 간부로 참여하였다. 1934년에는 남경한교회 주석으로서 [[의열단]] 활동에도 참여했으며, 1935년에는 [[낙양군관학교]]를 졸업한 후 교관으로서 군 간부양성에 주력하며 [[한국사]]를 가르치기도 했다. 같은 해 여름 [[한국독립당#s-2|한국독립당]]·[[신한독립당]]·[[조선혁명당#s-6.2|조선혁명당]]·의열단·미주대한인독립당 등 5개의 정당 대표가 난징에서 회합하여 통합당으로 「[[민족혁명당]]」을 조직할 때, 그는 실무간부로 활약하였으며 기관지 「민족혁명」을 발간하였다. 1937년에는 민족혁명당 상하이 특별지부장이 되어 [[김원봉]] 등 적색분자를 제거하는 청당운동에 참여하는 등 활약하였으며, 그해 10월에는 [[중일전쟁]]의 발발과 동시에 적극적 지도 임무를 띠고 군자금 모집 및 밀정처단 등 후방교란에 활약했는데 같은 해 12월 말 [[상하이]] 일본영사관에 체포되었다. 그 직후 그는 [[평양]]으로 압송되었고 1939년 7월 3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[[치안유지법]] 위반 혐의에 대해 최종적으로 상고 기각되면서[[http://theme.archives.go.kr/next/indy/viewIndyDetail.do?archiveId=0001164837&evntId=&evntdowngbn=N&indpnId=0000117459&actionType=det&flag=3&search_region=|#]] 평양형무소에서 4년간 옥고를 치렀다. 출옥 후에는 다시 상하이로 탈출하였으며, 1943년 3월 15일 [[대한민국 임시정부]] [[국무위원회]] 비서처의 부비서장에 임명되어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. [[8.15 광복]] 후 귀국하여 [[서울특별시]] [[서대문구]] [[연희동(서울)|연희동]]에 거주하였다. 196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으며, 1977년 5월 11일 별세하였다.