[include(틀:역대 고려 국왕)] [include(틀:역대 무신정권 집권자)] ||<-3><bgcolor=#fedc89><tablealign=right> {{{#94153e '''고려 임시 군주'''[br]{{{+1 '''英宗 | 영종'''}}}}}} || ||<-4> [[파일:고려 영종.jpg|width=300]] || || '''묘호''' ||<colbgcolor=white,#2d2f34>없음 / [[영종]](英宗) || || '''시호''' ||없음 / 영종대왕(英宗大王) || || '''작위''' ||안경후(安慶侯)[br]안경공(安慶公) || || '''성씨''' ||왕(王) || || '''이름''' ||간(侃) → 창(淐) || || '''아들''' ||한양후(漢陽侯) 왕현(王儇)[br]익양군(益陽君) 왕청(王淸) || || '''부왕''' ||[[고종(고려)|고종 안효대왕]] || || '''모후''' ||[[안혜태후]](安惠太后) || || '''생몰기간''' ||1223년 8월[* 개성왕씨 족보에서 계미년 8월생(1223년 8월생으로 기록되어 있다. 낮게 잡더라도 고려 원종의 출생이 1219년인 것을 보면 1219년 이후에 출생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.] ~ ? || || ''' 재위기간''' ||1269년 6월 21일 ~ 1269년 11월 || [목차] [clearfix] == 개요 == 고려의 임시 국왕. [[고종(고려)|고종]]의 아들이자 [[원종(고려)|원종]]의 동생. 본명은 왕창(王淐), 작위는 안경공(安慶公). 그 때문에 안경공 창(淐)이라고 불린다. 권신 [[임연]]의 압력에 의해 강제로 퇴위당한 원종이 양위하면서 잠시 보위에 올랐다. 굳이 재위 기간을 따지자면 1269년 6월 ~ 11월. 하지만 일반적으로 역사학계에서는 고려 국왕으로 인정되지 않고 있다. 묘호와 시호가 추봉된 기록이 있지만 실제로 사용되지는 않았다. 아래의 생애 문단 참조. == 생애 == ||<-2><tablealign=center><tablebordercolor=#fedc89><tablewidth=100%><bgcolor=#fedc89> '''{{{#670000 등극한 고종 안효왕(高宗 安孝王)의 아들}}}''' || ||<bgcolor=#fedc89> '''{{{#670000 24대}}}''' ||<bgcolor=#fedc89> '''{{{#670000 강제 등극}}}''' || ||<bgcolor=#ffffff> [[원종(고려)|원종 순효왕]] ||<bgcolor=#ffffff> [[영종(고려)|안경공]] || 1253년, [[몽골#s-1]]의 인질로 갔던 영녕공 왕준(永寧公 王綧)이 "태자나 안경공이 입조하면 군사를 물린다더라"고 전해왔다. 이에 [[최항]]은 결사 반대했지만 몽골의 침입으로 인해 겉잡을 수 없을 정도로 피해가 막대해지자 그 해 12월 사신으로 보내졌다. 1254년 1월 몽골 장수 [[아무칸]](阿母侃)의 군사를 접대하여 군사를 물리게 하고 몽골로 가서 [[몽케 칸]]을 만난 후 8월에 귀국하였다. 이때 오랑캐 풍습이 물들었다면서 굳이 하룻밤을 육지에서 머무르고 입었던 옷을 태운 다음 새 옷으로 갈아입고 [[강화도]]로 들어왔다. ~~방역~~ 이후 1257년, 1259년, 1265년에도 몽골과 교섭하였다. 몽케 칸을 만났을 때의 에피소드가 있다. 몽케 칸은 처음에는 안경공 왕창이 그 전에 인질로 간 영녕공 왕준의 동생이라고 여겨서 후하게 대접하였다 그런데 민칭(閔偁)이란 자가 사실을 고발해서 영녕공이 고려의 왕자가 아니라 친척임을 알았다. 물론 영녕공은 자기가 국왕의 친자가 아닌 줄은 몰랐다고 박박 우겼으며(...) --[[막장드라마]]-- 그와 함께 온 참지정사 최린도 '왕의 친자(親子)는 아니지만 왕의 사랑하는 자식(愛子)이니 그게 왕의 아들이라는 뜻임'이라며 콤비로 우겼다(...). 당연히 몽케 칸은 증거를 가져오라며 그 전에 고려에서 몽골에게 보낸 표문을 읽어 보았는데 정말로 표문에도 친자식(親子)이 아니라 사랑하는 자식(愛子)라고 쓰여져 있었다. 즉 [[거짓말은 하지 않는다|거짓말은 하지 않은 것]]. 몽케 칸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서(...) 불문에 부친 채 넘어가야 했다.[*출처 [[http://db.history.go.kr/id/kr_099r_0010_0020_0110|고려사 열전 12권 [[최유청]] 중 부 최린 부분]]] 권신 [[임연]]이 교정별감 [[김준(고려)|김준]]을 죽이고 정권을 차지한 뒤 원종마저 노리려고 하자 원종이 급히 양위를 해 왕이 되었다. 원종은 상왕이 되었고, 동시에 임연은 교정별감이 되었다. 그리고는 몽골에는 원종이 위중하여 양위했다고 알렸다. 하지만 당시 몽골에 갔다가 귀국하던 세자 [[충렬왕]]이 이 사실을 알고 급히 몽골로 돌아가 몽골에 알렸기 때문에, 임연은 다시 원종을 복위시키는 수밖에는 없었다. 그 후 충렬왕이 몽골군과 함께 귀국하게 되자 겁을 먹은 임연은 근심과 울분 속에 등창으로 죽었다. 아들 [[임유무]]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집권해서 환도를 반대했으나 몇 달 못가고 원종의 밀명을 받은 이들에게 죽임을 당하고, 결국 조정이 강화도에처 출륙하는 동시에 개경으로 환도하면서 100년간 이어진 [[무신정권]]은 막을 내리지만 동시에 고려 왕실이 얼마나 허약했는지를 반증하는 사례이다. 이후 영종은 다시 왕족의 삶을 누렸을 것으로 보이지만 정확히 언제 죽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. [[고려사절요]]에 따르면 이후 [[공양왕]] 3년(1391년)에 안경공의 기일을 맞아 공양왕이 안경공을 "영종(英宗)"으로 추존해 태묘에 제사지내려 시도했지만, 안경공은 형의 자리를 잠깐 빼앗았던 찬탈자일 뿐이라는 예조의 반대에 부딪혀 포기하게 되었고, 왕의 신분으로 복권되지 못한 채 고려가 다음해 멸망하고 만다. 안경공의 묘호와 시호는 고려사절요와 [[고려사]]에 다르게 기록되있다. 고려사절요엔 '''묘호''' "영종"과 시호를 올렸지만(시호는 미상) 신하들이 영 아닌것 같다고 해 무산됐는데 고려사 열전 안경공 왕창 조에는 그냥 "사후 '''시호''' "영종"을 추봉했다."라고만 나와있다. == 여담 == 재위가 하도 짧아서 특별한 일은 없지만, [[최탄]]이 몽골에 투항해 서경([[평양]])을 포함한 고려의 60여성을 바치고 [[동녕부]]가 설치된 때가 이 때. 이 사람의 후손은 조선 초기의 [[왕씨 학살]] 과정에서도 어찌어찌 살아남아서(차남 왕청의 후손) 안경공파(安慶公派)를 이루고 있다. [각주] [include(틀:문서 가져옴, title=영종, version=77)] [[분류:고려 국왕]][[분류:대립왕]][[분류:고려의 공작]][[분류:1223년 출생]][[분류:몰년 미상]][[분류:나무위키 한국사 프로젝트]]