[[분류:예루살렘 국왕]] [[분류:앙주 가문]] [[분류:1136년 출생]] [[분류:1174년 사망]] [[분류:이질로 죽은 인물]] [include(틀:역대 예루살렘 왕국 국왕)] ||||<table bordercolor=#FFD700><table bgcolor=#FFFFFF><table align=center><:>[[파일:아모리 1세.jpg|width=200]] || ||||<:><bgcolor=#FFD700> '''{{{#005ba6 [[예루살렘 왕국]]의 제6대 국왕}}}'''|| ||<#FFD700> '''{{{#005ba6 즉위명}}}''' ||<(> [[아모리 1세]](Amaury I) || ||<#FFD700> '''{{{#005ba6 이름}}}''' ||<(> [[아모리 1세|아모리 당주]](Amaury d'Anjou) || ||<#FFD700> '''{{{#005ba6 출생일}}}''' ||<(> [[1136년]] || ||<#FFD700> '''{{{#005ba6 출생지}}}''' ||<(> [[예루살렘 왕국]] [[예루살렘]] || ||<#FFD700> '''{{{#005ba6 사망일}}}''' ||<(> [[1174년]] [[7월 11일]] (38세) || ||<#FFD700> '''{{{#005ba6 사망지}}}''' ||<(> [[예루살렘 왕국]] [[예루살렘]] || ||<#FFD700> '''{{{#005ba6 매장지}}}''' ||<(> [[예루살렘 왕국]] [[예루살렘]] [[성묘교회]] || ||<#FFD700> '''{{{#005ba6 가문}}}''' ||<(> [[앙주 가문|앙주]] (House of Anjou) || ||<#FFD700> '''{{{#005ba6 부모}}}''' ||<(> [[부친]] [[풀크|풀크 당주]][br][[모친]] [[멜리장드|멜리장드 드 레텔]] || ||<#FFD700> '''{{{#005ba6 배우자}}}''' ||<(>아녜스 드 쿠르트네[br]마리아 콤니니 (마리 콩넨) || ||<#FFD700> '''{{{#005ba6 자녀}}}''' ||<(>[[시빌라(예루살렘 왕국)|시빌 당주]][br][[보두앵 4세|보두앵 당주]][br][[이사벨 1세(예루살렘 왕국)|이자벨 당주]] || ||<#FFD700> '''{{{#005ba6 종교}}}''' ||<(> [[로마 가톨릭]] || ||<#FFD700> '''{{{#005ba6 재위기간}}}''' ||<(> [[1162년]] 2월10일 ~ [[1174년]] [[7월 11일]] (12년 5개월 1일) || [[프랑스어]]: Amaury (아모리) [[라틴어]]: Amalricus (아말리쿠스) 형 [[보두앵 3세]]는 [[1153년]] [[이집트]]의 영토인 아스칼론을 점령하여 아모리에게 주었고 아모리는 야파와 아스칼론의 백작이 되었다. 아모리는 [[1157년]] [[에데사 백작국|에데사]]의 조슬랭 2세의 딸인 아녜스와 결혼했으며 [[1162년]] 형 [[보두앵 3세]]가 죽자 뒤를 이었다. 그러나 귀족들은 아녜스의 행실이 나쁘다는 점을 이유로 이혼할 것을 요구했고 결국 아모리는 아녜스와 이혼하고 왕위에 올랐다. 아녜스는 이벨린의 위그와 재혼했지만 그녀가 낳은 [[시빌라(예루살렘 왕국)|시빌라]]와 [[보두앵 4세|보두앵]]은 왕위 계승자의 법적 지위는 보장받을 수 있었다. [[1163년]] 아모리 1세는 [[파티마 왕조]]가 연공을 바치지 않았다는 구실로 이집트를 기습했고 이집트는 나일 강의 댐을 허물어 물바다 작전으로 협상을 시작했다. 누르 앗 딘은 이 기회로 자신의 부관 [[시르쿠]]에게 이집트를 공격하게 하는 한편 아모리가 없는 틈을 타 [[안티오키아 공국|안티오키아]]의 보에몽 3세와 [[트리폴리 백작국|트리폴리]]의 레몽 3세를 포로로 잡았다. 아모리는 [[에데사 백국]]과 [[트리폴리 백국]]의 섭정을 맡고 [[1165년]] 보에몽의 몸값을 지불하고 빼내왔다. 한편 아모리 1세는 [[동로마 제국]]에 사절을 보내어 자신의 신부감을 구하고 누르 앗 딘에 맞서 동맹을 맺으려고 하였다. [[1167년]] 누르 앗 딘이 다시 한번 이집트를 침공하자 아모리는 이집트 [[칼리프]] 알아디드와 협정을 맺고 나일 강에서 시리아군에 맞서 싸웠다. 카이로로 퇴각한 [[시르쿠]]는 [[알렉산드리아(이집트)|알렉산드리아]]를 점령했다. 아모리는 알렉산드리아로 진격하여 공성전을 폈고 시르쿠는 협상을 통해 그 도시를 아모리에게 넘겨주었다. 그러나 아모리는 알렉산드리아에 오래 머물지 않고 [[예루살렘]]으로 퇴각했다. [[1167년]] 아모리는 [[동로마 제국]]의 마리아 콤니니(Μαρία Κομνηνή)와 결혼했다. 이듬해 아모리와 동로마 황제 [[마누엘 1세]] 콤니노스는 동맹을 맺고 누르 앗 딘에 공동으로 맞서기로 했다. 아모리는 이집트가 누르 앗 딘과 내통한다는 의혹이 일자 [[마누엘 1세]]와 함께 이집트를 다시 한번 침공하여 많은 공물을 받았다. 그러나 누르 앗 딘은 [[시르쿠]]를 이집트로 보내 [[1169년]] 이집트를 손에 넣었고 [[시르쿠]]의 조카인 [[살라흐 앗 딘]]이 이집트의 권력을 잡았다. 아모리는 [[살라흐 앗 딘]]의 등장을 유럽에 알렸으나 지원군은 없었다. 아모리는 [[동로마]]군의 도움으로 다미에타(Damietta)의 [[살라흐 앗 딘]]을 공격했으나 실패로 끝났다. [[1170년]] [[살라흐 앗 딘]]은 [[예루살렘 왕국]]을 침공하였고 힘을 더 키워 이듬해에는 이집트의 [[술탄]]이 되었다. 아모리는 직접 [[콘스탄티노폴리스]]를 방문하여 [[살라흐 앗 딘]]의 위협을 알렸으나 역시 도움은 없었다. 이제 [[예루살렘 왕국]]은 남쪽으로 [[살라흐 앗 딘]], 북쪽으로는 누르 앗 딘, 그리고 새로이 등장한 [[이슬람]] 분파인 [[어쌔신|아사신파]]의 위협에 직면했다. [[1174년]] 누르 앗 딘이 죽자 아모리는 즉각 바니아스(Banias)를 공략했다. 그러나 그 원정길에서 아모리는 [[이질(질병)|이질]]에 걸렸고 고열에 시달려 [[예루살렘]]으로 돌아왔다. 의사들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, 그해 [[7월 11일]] 죽었다. 아모리의 두 번째 부인인 마리아 콤니니는 [[이사벨]]을 낳고 나블루스(Nablus)를 유산으로 받았다. 아녜스가 낳은 아들 [[보두앵 4세|보두앵]]이 아모리의 뒤를 이었다. 아모리가 사망한 뒤 마리아 콤니니는 [[발리앙 디블랭]]과 재혼했다. '이벨린의 발리앙'으로 불리는 그 사람이다. 이 때문에 보두앵 5세가 사망한 뒤 왕위 계승을 둘러 싸고 발리앙과 기 드 뤼지냥 간의 대립이 있었다. 발리앙은 자신의 양녀인 이사벨을 계승 후보로 밀었기 때문이다. 이 이야기는발리앙 디블랭과 [[기 드 뤼지냥]] 문서 참조. 여담으로 프랑스아로 아모리는 amalric 이고 애므리는 aimery 인데 상당히 헷갈린다. 따라서 본래 둘은 다른 이름이지만 서유럽 사가들도 이를 헷갈려하여 전자를 아모리 1세, 후자를 아모리 2세로 칭하게 된 것인데 이것은 명백한 오류이다. 따라서 예루살렘 국왕의 계보를 따질 때에 아모리와 [[애므리 드 뤼지냥]]으로 구분해 부르는 것이 맞다. --다만 아모리 문서가 캐릭터에게 빼앗겨서 문서명을 유지한다--