[[파일:아메디.jpg|width=780]] 항공 촬영한 아메디의 장엄한 모습 [[쿠르드어]] {{{+1 ئامێدی }}} [[아랍어]] {{{+1 العمادية }}} == 개요 == ||[[파일:아메디 1.jpg|width=509]]||[[파일:아메디 2.jpg|width=420]]|| 아메디의 관광 홍보 사진과 랜드마크인 15세기의 미나렛 [[이라크]] 북부 [[쿠르디스탄]]의 다후크 주의 산간 도시. 이라크의 공용어인 아랍어로는 알 아마디야로 부른다. [[이라크]] 북부 [[쿠르디스탄]]의 다후크 주의 산간 도시. 이라크의 공용어인 아랍어로는 알 아마디야로 부른다. [[모술]]에서 동북쪽으로 80여 km, [[아르빌]]에서 서북쪽으로 100km 떨어진 인구 1만 1천의 산간 도시이다. 대자브 강으로 흘러드는 지류를 끼고 해발 1400m 의 고지에 위치한 덕에 여름 피서지로도 알려져 있다. [[터키]] 국경과 직선거리로는 매우 가까우나, 험준한 산맥을 사이에 둔 탓에 실질적으로 월경을 위해선 서쪽으로 70km 떨어진 자호까지 가야 한다. [[쿠르드]] 문화의 거점 중 한곳이고, 동시에 다수의 [[유대인]], [[아시리아인]] 공동체가 있는 등 [[자지라]] 지방의 다문화적 특성을 잘 간직한 도시이다. == 역사 == 방어에 유리한 입지 덕에 문명의 태동 무렵부터 주거지가 형성되었다. 기원전 2500년 경부터 현재와 같은 아메디란 이름으로 알려져 있었고, 일대의 패권국이던 [[아시리아]]에 천년 넘게 속하였다. [[메디아]]인 사제인 마기의 본거지이던 아메디는 이란의 [[카샨]]과 함께 [[동방박사]]의 출신지 후보들 중 하나이다. 그후 [[아케메네스 제국]], [[셀레우코스 왕조]], [[파르티아]], [[사산 제국]]을 거쳐 7세기 중반 [[이슬람 제국]]령이 되었다. 중세 아메디는 압바스 가문의 파샤가 다스렸고, 그 가문은 일대에서 가장 부유했다고 한다. 10세기 무렵부터 아메디 일대에는 쿠르드인과 유대인들이 정착하기 시작하였다. 후자의 선구자인 하잔[* 쿠르드 유대인들에게 하잔은 호칭화되어 아랍어의 통치자를 의미하는 하캄이나 랍비에 버금가는 용어가 됨] 다비드 (935년경 사망)은 ([[에스겔]])의 무덤으로 전해지는 곳에 매장되었다. [[셀주크 제국]]이 쇠퇴하던 1163년에는 아메디 출신 유대인 메나헴 벤 솔로몬 (다우드 이븐 알 루히)이 스스로를 다비드 '알로이' (깨달은 자)라 칭하며 일대의 유대인들을 모아 반란을 일으켰다. 그는 아메디 시타델을 공격했으나 격퇴되었고, 셀주크 숥탄은 그가 항복하지 않는다면 영내의 유대인들을 죽일 것이라 협박하기도 하였다.[* 이에 모술 등지의 유대교 지도부가 해산을 촉구하기도 했으나 무용지물이었음] 결국 아메디 총독이던 사이프 앗 딘이 다비드의 장인을 매수해 그를 죽이게 함으로써 반란은 진압되었고, 이란의 유대인들은 큰 추징금을 물어야 했다. 다만 이후로도 아메디의 1천 가구에 달하는 유대인들은 과일을 판매에 주로 종사하며 유지되었다. 1177년에 아메디에는 대모스크가 세워졌다. 법학, 아랍어 등의 과목이 있던 그 부설 마드라사는 아메디에서 가장 큰 교육 기관이었다. 1228년에는 에제키엘-다비드 영묘에 전자를 기리는 크니스 나비 예즈켈 시나고그가 세워졌고, [[오순절]] 때마다 그곳으로 유대인 순례객들이 모여들었다. 1376년부터 아메디는 쿠르드계 자치 공국인 반디난 토후국의 수도가 되었다. 15세기 술탄 후세인 알 왈리는 모스크를 중건하고 모술의 누리 모스크를 모방한 높이 80m의 미나렛을 세웠다. 19세기 무렵 6천의 주민은 2500명의 쿠르드, 1900명의 유대, 1600명의 아시리아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. 그러던 1843년 반디난 국이 폐지되고 일대는 [[오스만 제국]]의 직접 지배를 받게 되었다. 20세기 들어 쿠르드 인들은 이라크 정부에 반기를 들었는데, 그 보복으로 1961년 이라크 공군이 공습을 가하였다. 그로 인해 랜드마크인 미나렛의 상부가 피해를 입기도 하였으나 후에 복원되어 현재에 이른다. [[분류:이라크의 도시]][[분류:자지라]][[분류:옛 수도]]