||<tablewidth=100%><tablealign=center><tablebordercolor=#c7a956><tablebgcolor=#ffffff,#191919> 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; padding: 7px 10px; background-image: linear-gradient(to right, #3D7CBA 0%, #0755A1 30%, #0755A1 70%, #3D7CBA)" {{{#ffffff '''아돌포 발론체리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'''}}}}}} || || {{{#!folding [ 펼치기 · 접기 ] ---- ||<-5><tablealign=center><tablewidth=100%><bgcolor=#113ed7> '''{{{#ffffff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주장}}}''' || ||<width=30%> 루이지 체베니니[br](1925~1927) || {{{+1 →}}} ||<width=30%><bgcolor=#ffffff,#191919> '''{{{#113ed7 아돌포 발론체리[br](1927~1930)}}}''' ||{{{+1 →}}} ||<width=30%> [[움베르토 칼리가리스]][br] (1931~1934) || ---- [include(틀:AC 밀란 감독(1대~38대))] ---- ||<-5><tablealign=center><tablewidth=100%><tablebordercolor=#2192cc><tablebgcolor=#265c9b><height=35><bgcolor=#2192cc> [[SSC 나폴리|{{{#fff ''' SSC 나폴리 감독 ''' }}}]] || ||<height=60><width=30%><rowbgcolor=#fff,#191919> 기술 위원회 ||<width=5%> [[SSC 나폴리|[[파일:SSCNapoli.png|width=100%]]]] ||<width=30%><bgcolor=#0bb6f2> {{{#fff '''9대'''[br]{{{+1 '''[[아돌포 발론체리|{{{#fff 아돌포 발론체리}}}]]'''}}}}}} ||<width=5%> [[SSC 나폴리|[[파일:SSCNapoli.png|width=100%]]]] ||<width=30%> '''10대'''[br]안토니오 보야크 || ||<height=35> {{{#fff ''' 1939년 ''' }}} || || {{{#fff ''' 1939년~1940년 ''' }}} || || {{{#fff ''' 1940년~1943년 ''' }}} || ---- ||<-5><tablealign=center><tablewidth=100%><bgcolor=#b20032> '''{{{#ffb612 AS 로마 역대 감독}}}''' || ||<width=30%> 풀비오 베르나르디니[br](1949~1950) || {{{+1 →}}} ||<width=30%><bgcolor=#ffb612><color=#373a3c> '''{{{#b20032 아돌포 발론체리}}}'''[br]'''{{{#b20032 (1950)}}}''' || {{{+1 →}}} ||<width=30%> [[피에트로 세란토니]][br](1950) || }}} || [[파일:Adolfo Baloncieri.jpg]] || 이름 || 아돌포 발론체리[br](Adolfo Baloncieri) || || 생년월일 || [[1897년]] [[7월 27일]] || || 사망년월일 || [[1986년]] [[7월 23일]] || || 국적 || [[파일:이탈리아 국기.svg|width=28]] [[이탈리아]] || || 출신지 || [[알레산드리아]] || || 포지션 || 인사이드 포워드 || || 신체조건 || 182cm / 77kg || || 등번호 || -[*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.] || || 소속팀 || 알레산드리아 (1919-1925)[br]'''[[토리노 FC]] (1925-1932)'''[br]코멘세 (1932-1933)[br]알레산드리아 (1943-1944) || || 국가대표 || 47경기 / 25골 (1920-1930)[br] || || 감독 || 코멘세 (1932-1933)[br][[AC 밀란]] (1934-1936)[br]노바라 칼초 (1936-1937)[br]리구리아 (1937-1939)[br][[SSC 나폴리]] (1939-1940)[br]리구리아 (1940-1942)[br]알레산드리아 (1942-1945)[br][[AC 밀란]] (1945-1946)[br]치아소 (1946-1947)[br][[UC 삼프도리아]] (1947-1950)[br][[AS 로마]] (1950)[br]치아소 (1951-1952)[br][[US 치타 디 팔레르모|US 팔레르모]] (1954)[br][[UC 삼프도리아]] (1958)[br]치아소 (1961-1962) || [목차] == 생애[* 출처: 위키피디아, 11v11] == === 어린 시절 === 발론체리는 알레산드리아 지방의 카스텔체리올로에서 태어났다. 9살 무렵 [[아르헨티나]] 로사리오에 건너가 12년을 보냈고 아마추어 축구 선수인 형 마리오의 영향으로 축구와 인연을 맺었다. === 선수 생활 === ==== 클럽 ==== [[제1차 세계 대전|1차 대전]]이 끝나고 1919년 이탈리아에 돌아온 발론체리는 고향팀 알레산드리아에 입단했고, 카를로 카르카노[* 카르카노는 나중에 [[유벤투스 FC|유벤투스]]의 감독이 되어 전설적인 [[세리에 A]] 5연패를 이끈다.]와 같이 뛰게 되었다. 첫 시즌에는 북부 리그 준결승에 오르는 데에 만족해야 했고, 다음 시즌에는 결승에 갔지만 프리마 카테고리아[* [[세리에 A]]의 전신.] 우승팀이 될 [[FC 프로 베르첼리 1892|프로 베르첼리]]에 밀려 프리마 카테고리아에는 나가지 못했다. 계속 이렇게 팀이 우승에 거리가 먼 모습을 보이자 발론체리는 결국 1925년 [[토리노 FC]]로 팀을 옮기게 되었다. 발론체리는 이적하자마자 적응기 없이 팀 내 최다 득점자가 되었고, 다음 시즌에선 [[훌리오 리보나티]] 등과 호흡을 맞추며 파괴적인 공격력을 선보였다. 결국 꿈에 그리던 프리마 디비시오네 우승을 차지했지만 이 우승은 [[알레만디 스캔들]]로 박탈되었다.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다음 시즌에는 논란없이 우승을 차지하는데 성공했다. 토리노는 1929년에도 프리마 디비시오네에 진출했지만 여기서는 [[볼로냐 FC 1909|볼로냐]]에 발목을 잡혀 준우승에 머무르고 말았다. 1932년 그는 토리노에서의 생활을 끝내고 코멘세에서 [[선수 겸 감독]]으로 마지막 불꽃을 태웠고 리그 통산 316경기 출전, 169골의 기록을 남겼다. ==== [[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|국가대표팀]] ==== 발론체리는 1920년 5월, [[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|네덜란드]]를 상대로 국가대표팀에 데뷔하였다. 그리고 곧 [[1920 안트베르펀 올림픽|올림픽]] 3경기에 참가하였고 [[이집트 축구 국가대표팀|이집트]]를 상대로 골도 넣었다. 그 이후 발론체리는 [[1924 파리 올림픽|2번의]] [[1928 암스테르담 올림픽|올림픽]]에 더 참가했다. 특히 암스테르담 올림픽에서는 주장으로 참가, 5경기 6골의 훌륭한 활약을 펼치며 이탈리아 축구계에 동메달을 안긴 1등 공신이 되었다. 발론체리는 이탈리아 국가대표로 47경기에 출전[* 그 중 28경기는 주장으로 출전했다.], 25골의 득점 기록을 남겼다. 이것은 [[주세페 메아차]]가 돌파하기 전까지 이탈리아 대표팀 내 최고 득점 기록이었으며 현재도 [[필리포 인자기]], [[알레산드로 알토벨리]]와 함께 공동 6위에 랭크되어 있다. === 이후 === 1931 시즌부터 발론체리는 [[토리노 FC]]의 플레잉 코치로 감독 준비를 시작했다. 코멘세를 거쳐 1934년부터 [[AC 밀란]]에서 2년 반을 보냈다. 노바라 칼초, 리구리아의 감독직 이후 [[SSC 나폴리]]의 소방수로 투입되었지만 한 시즌도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경질되었고 1942년부터 [[제2차 세계 대전|전쟁]]이 끝날 때까지 고향팀 알레산드리아에서 감독직을 수행했다. 여러 팀에서 감독직을 수행하던 발론체리의 리그 최고 기록은 [[UC 삼프도리아]]를 이끌고 1948-49 시즌에 기록한 5위였다. 발론체리는 1962년 스위스의 치아소에서 마지막 감독 임기를 마쳤고 1986년 [[폐렴]]으로 숨을 거두었다. == 플레이 스타일 & 평가 == 공격형 플레이메이커로서 빠르고 재능 넘치는 선수였다. 또한 우아하고 창의적이며 넓은 시야를 바탕으로 한 패스에도 능했다. 레나토 카살보레는 아르헨티나에서 보낸 어린 시절에 익힌 축구와 이탈리아의 게임 방식이 결합해서 그런 플레이를 펼치게 된 것이라는 추측을 내놓기도 했다. 이탈리아의 축구 원로 기자 잔니 브레라는 생전에 발론체리를 [[주세페 메아차]], [[발렌티노 마촐라]] 등과 동급의 플레이메이커로 놓았고 카를로 키에사도 그를 역대 최고의 [[레지스타]]라 할 순 없어도 최고 중 한 명이라고 평했다. > 그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: 세트 플레이, 행동을 취할 때의 판단력, 슛, 드리블, 싸움, 전진, 가끔은 경이로운 골까지 말이다. >---- > 프랑코 오솔라 주니어 > 발론체리 자신에게 힘을 줄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다른 이들의 행동에도 영향을 준다. >---- > il primo vero, autentico regista del nostro calcio(우리 축구 최초의 진정한 감독) 중에서 > 그는 조작하는 감각, 운동의 인지, 위치 선정의 직관, 슈팅의 속도[* 슈팅 타이밍으로 추측된다.]를 갖고 있다. >---- > 안토니오 기렐리 > 특이한 걸음걸이를 가지고 있었다. 그는 그가 보통 생각했던 뒤쪽 위치에서 슈팅을 하곤 했고, 수비수들의 속을 끄집어내었으며, 볼터치는 공격을 이끌어내고 전진을 연출한다. >---- > [[비토리오 포초]] == 뒷이야기 == * 발론체리가 1927년 [[스위스 축구 국가대표팀|스위스]]를 상대로 기록한 득점은 이탈리아 대표팀의 통산 100번째 득점이었다. 그리고 그는 이 골을 포함해 [[해트 트릭]]을 기록하며 이탈리아의 5대1 대승을 이끌었다. == 수상 == === 클럽 === * 프리마 디비시오네 우승 1회: 1927-28([[토리노 FC]]) * 프리마 디비시오네 준우승 1회: 1928–29(토리노 FC) === 국가대표 === * [[올림픽]] 3위 1회: [[1928 암스테르담 올림픽|1928]] * 중유럽 컵 우승 1회: 1927-30 === 개인 === * 토리노 FC 명예의 전당 [각주] [[분류:1897년 출생]][[분류:1986년 사망]][[분류:이탈리아의 축구선수]][[분류:토리노 FC/은퇴, 이적]][[분류:이탈리아의 올림픽 축구 참가 선수]][[분류:이탈리아의 올림픽 메달리스트]][[분류:선수 겸 감독/축구]][[분류:이탈리아의 축구감독]][[분류:노바라 칼초/역대 감독]][[분류:AC 밀란/역대 감독]][[분류:SSC 나폴리/역대 감독]][[분류:UC 삼프도리아/역대 감독]][[분류:AS 로마/역대 감독]][[분류:US 팔레르모/역대 감독]]