[include(틀:사건사고)] {{{+2 上尾事件}}} (あげおじけん) [목차] == 개요 == 1973년 3월 13일 [[일본]] [[사이타마현]]의 [[아게오역]]을 중심으로 일어난 사상 초유의 승객 폭동이다. 말 그대로 시민들이 '''빡치면''' 그야말로 [[헬게이트]]를 열어버릴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사건이다. 뒤이어 일어난 더 큰 규모의 [[수도권 국철 폭동]]과 함께 [[일본국유철도]]의 운명을 결정한 사건이기도 하다. [[http://newslibrary.naver.com/viewer/index.nhn?articleId=1973031400209207015&editNo=2&printCount=1&publishDate=1973-03-14&officeId=00020&pageNo=7&printNo=15829&publishType=00020|한국의 동아일보에서도 이 사건을 보도하기도 하였다.]] == 사건 경과 == 1973년 3월 [[일본국유철도]](JNR) 동력차노조[* 일반적으로 단순히 국철노조로 묶어 인식되곤 하지만 국철의 노조는 직렬과 노선에 따라 사분오열되어 있었다. (거의 어용노조 급에서 일본 극좌의 핵심세력까지 다 갖추고 있었다고 봐도 무방하다.) 이 중 동력차노조는 기관사들이 소속된 조합의 집단. 여담으로 과거의 국철노조 집단은 지금도 남아 [[JR그룹]] 계열의 노조로 존속하고 있다.]는 2인승무를 요구하며 산발적으로 '순법투쟁'을 벌이고 있었다. 당시 국철을 포함해 일본의 공공기업은 현재도 존속하고 있는 '공공기업체 등의 노동관계법'에 의해 파업이 금지되어 있어서 그 대안으로 '''순법투쟁'''[* 한국에서는 준법투쟁으로 불리며, 명목상 열차운행을 매뉴얼대로 전부 지키는 것을 말한다. 정비, 점검, 운행 등 모든 부분에서 명목상의 절차를 준수하는 것을 내세우지만 실질적으로는 [[사보타주]]에 해당하는 결과로 나타난다. 1990년대 한국의 철도노조에서도 곧잘 행해졌는데, 가령 정차역 개문 30초를 준수한다고 하고는(당시 수도권 전철에서는 승강객만 적으면 10초단위 개문도 흔했다.) 실질적으로는 분단위 정차가 횡행하거나, 속도 제한이 붙으면 그 제한을 한없이 밑도는 속도로 굴러가는 식으로 열차를 늦춘다. 결과적으로 분명히 모든 차량과 인원을 투입했는데 다이어그램이 꼬이고 소요시간과 배차간격이 몇배씩 늘어나게 된다.]을 벌이곤 했다. 그러나 노조도 노조이지만 국철이나 당국 또한 대체수송 등의 대책이나 노조와의 협상을 진행하지 않아 일을 키웠다. 1970년대 초반은 전후 [[베이비붐 세대]]가 경제활동에 나서면서 대도시권 인구가 폭증하던 시기로, 아게오와 같이 거리가 먼 교외 지역에도 통근/통학을 위한 철도 승객이 많이 늘어났으나 정작 직원들이 시위를 하느라 열차 배차 간격이 제멋대로였고, 국철이 운영하던 모든 노선은 하나같이 '''[[헬게이트|지옥철]]''' 그 이상이었다. 사건이 일어난 아게오역은 [[타카사키선]]의 역으로, 타카사키선은 국철의 경영이 바닥을 기던 1970년대 초반에도 흑자를 낸 노선이다. 즉 [[도쿄]] 한복판을 도는 [[야마노테선]]에 맞먹게 혼잡했다는 뜻이다. 노조의 순법투쟁 순서가 타카사키선에 돌아온 것이 3월 12일부터로, 당시 보도에서는 아게오에서 [[우에노역]]까지 보통 37분 걸리던 것이 3시간 이상 걸렸다고 한다. '''특급 열차'''도 '''완행 열차'''[* 이 때, [[우스이 급구배]] 전용으로 제작된 [[169계 전동차]](1967년 제작)가 완행열차로 운행되었다. 그러나 2비차인 169계 전동차는 수송능력이 통근용으로는 적합하지 않고 혼잡만 가중시켰다.]로 운행되었을 정도로 엉망인 상황에서 이날, 개찰거부와 운행정지가 연속되자 [[아게오역]]에서 시민들이 멈춘 열차에 투석을 한 것으로 시작됐다. 당시 열차를 몰던 기관사는 열차 앞문을 통해서 탈출하였으나 소란은 역 전체로 확대, 역원들까지 도망치고 역장은 붙들려 집단 린치를 당했다. 사태는 역 시설물의 파괴와 방화로 이어진 것은 물론이고 국철이 마비되자 인근 역의 시민들까지 폭동을 시작하기에 이른다. 당시 관할 경찰이던 사이타마 경찰이 550명이나 출동해 진압을 시도했으나, 몇천 내지 몇만 명의 군중을 진압하기란 불가능했다.[* 인근의 [[오미야역(사이타마)|오미야역]]에서도 폭동이 발생했다.] 사태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시민들이 자진 해산하는 형태로 마무리 되었으나, 이후 아게오 역과 관련된 노선의 운행이 며칠동안 중단되는 바람에 철길을 걸어가서 통근 및 통학을 하는 경우가 상당했다. 국철노조는 당초 폭동의 원인으로 노조를 탄압하려는 당국이 개입하여 조장했다는 음모론을 제기하였으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. 다만 훗날 자신이 폭동을 선동했다고 주장하는 우익 인사는 있었다. == 그 후 == 총 7명이 검거가 되었는데, 엉뚱하게도 '''혼란한 틈을 노려 금품을 훔친 사람''', '''기자를 폭행한 사람''' 뿐이었다. 또한 이 사건 이후에도 국철노조의 시위는 끝나지 않았고 결국 한 달 후, [[수도권 국철 폭동]]이라는 스케일 업된 시민 폭동으로 이어지게 되며 국철의 몰락이 시작되었고 결과적으로 이러한 사건들은 '''오늘날의 [[JR그룹|JR]]이 탄생하는 계기'''가 된다. 이 사건은 발생의 원인이었던 국철노조와 [[타카사키선]]의 혼잡으로 요약 가능한데, 국철노조는 [[JR그룹]]이 탄생하는 과정에서 해체되었고, [[타카사키선]]의 혼잡 역시 바이패스 역할을 하는 [[사이쿄선]]이 1985년에 개통되어 승객이 분산되고 [[조에츠 신칸센]]과 [[호쿠리쿠 신칸센]] 오미야 - 나가노 구간[* 이때는 나가노 신칸센이라는 명칭으로 개업했다.]이 1997년에 개통되면서 장거리 재래선 열차 숙청으로 선로 용량에 숨통이 트이면서 아게오 사건 발생 당시보다는 많이 완화되었다. [youtube(aPC_rRCXmDk)] * 당시 사건을 다룬 뉴스 영상. 나중에 터진 수도권국전폭동도 함께 다루고 있다. 비슷하게 일본인 [[전투종족]]이 출현한 사례로 [[나리타 공항]]을 들 수 있다. 이쪽은 농민들과 좌익운동가들의 합작품. [[분류:쇼와 시대/철도사고]] [[분류:폭동]] [[분류:1973년/사건사고]] [[분류:사이타마현의 사건사고]]