[[분류: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]][[분류:한국의 독립운동가]][[분류:한국의 사회주의 독립운동가]][[분류:한국의 공산주의자]][[분류:건국훈장 애족장]][[분류:건국포장]][[분류:동명이인/ㅅ]][[분류:평산군 출신 인물]][[분류:논산시 출신 인물]][[분류:거창 신씨]][[분류:1897년 출생]][[분류:몰년 미상]][[분류:1947년 사망]][[분류:서울대학교 출신/전신 학교]] [목차] == 평산군 출신 독립운동가, 愼表晟 == || 성명 ||신표성(愼表晟) || || 본관 ||[[거창 신씨]][* 참판공파 30세손 '''성(晟)''', 성(珹) 항렬.] || || 생몰 ||[[1897년]] [[7월 21일]] ~ ? || || [[출생지]] ||[[황해도]] 평산군 금암면 이리[* 1914년 이리의 일부를 분리하여 평산군 금암면 재궁리 신설됨.][* [[거창 신씨]] 집성촌이다.][br](현 [[황해북도]] [[평산군]] 용궁리) || || 추서 ||건국훈장 애족장 || 신표성(愼表晟)은 1897년 7월 21일 황해도 평산군 금암면 이리(현 황해북도 평산군 용궁리)의 평민 집안에서 아버지 신종은(愼宗殷)과 어머니 [[광산 김씨]][* 아버지 신종은의 재취(再娶)였다. 정실부인 [[여흥 민씨]]는 불임(不姙)이었다고 거창 신씨 족보에 기재되어 있다.] 사이의 6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. 이후 금암면 한포리(현 평산군 한포리)로 이주하였다.[[http://db.history.go.kr/id/hd_032r_0010_0020|#]] 그는 일찍이 서당에서 3년간 한문을 배우고 1919년 5월까지 약 2년간 평산군 금암면사무소의 서기로 근무하였으며, 이후에는 한포리에 사는 안해민(安海珉)[* 황해도 평산군 금암면 유지로 추정된다. 1913년 6월 [[신계군]] 소방조에 제공하는 기구 구입비용에 쌀과 조 각각 5말씩 기부하여 1915년 3월 2일 [[조선총독부]]로부터 나무잔을 수여받았다.[[http://db.history.go.kr/id/gb_1915_03_02_a07710_0060|#]] 이후 1917년 4월 29일까지 누천(漏川)지방금융조합의 감사로 재직하였다.[[http://db.history.go.kr/id/gb_1917_05_17_a14340_0670|#]] 1918년 2월 1일 누천지방금융조합 감사에 재취임해있는 것으로 나타났다.[[http://db.history.go.kr/id/gb_1918_02_08_a16510_0750|#]] 이후 남천(南川)금융조합 감사로 있다가, 임기가 만료되었으나 1921년 4월 24일 정기총회에서 중임하는 것으로 결정되어 재취임하였다.[[http://db.history.go.kr/id/gb_1921_05_26_a26360_0470|#]] 1923년 4월 24일 남천금융조합 감사에 재취임하였다.[[http://db.history.go.kr/id/gb_1923_05_17_a32280_0300|#]] 1925년 4월 25일 남천금융조합 감사에 재취임하였다.[[http://db.history.go.kr/id/gb_1925_06_04_a38390_0440|#]]]의 고용인으로 일했다.[[http://db.history.go.kr/id/hd_032r_0020_0080|#]] 1920년 4, 5월경 [[대한민국 임시정부]] 교통국 참사(參事)로 평산군 서봉면 봉동에 사는 [[정의도]]는 신표성이 서기로 일하는 금암면사무소를 방문, 신표성에게 자신이 황해도 봉산군 사원면 손재흥(孫再興)의 집에서 가져온 [[독립신문]] 호외를 보여주면서, "[[미국 상원]]에서 조선의 독립을 승인하였고, 결국 조선은 독립이 될 것이니 너도 독립운동에 진력하라."고 하자, 신표성은 "나는 고용되어 있는 신분이므로 그런 일은 할 수 없다"며 거절하였다. 이에 정의도는 [[상해임시정부]]와 [[프랑스]] 정부가 서로 특별 협약을 맺어 조선인으로서 1,000원을 프랑스 정부에 납부하면 7년간 옷과 식량을 무상 제공받으며 학업에 전념할 수 있다며 공부하러 가는건 어떤가하며 권유하였고 표성이 이에 승낙하자, 손재흥을 찾아가면 수속을 해줄 것이라고 하면서 돌아갔다. 이에 표성은 임시정부로 가기로 결심하고서, 일전에 1919년 1, 2월경에 밭을 팔아 얻은 돈 750원과 1920년 4, 5월경에 소를 팔아 얻은 돈 70원을 주인 안해민에게 맡겨둔 것을 비롯해, 그 밖에 13개월 치 월급을 받지 않고 맡겨 둔 195원에 1920년 6월 7일에 그 돈에 이자를 가산한 1,073원 18전을 주인 안해민에게 공부하러 가겠노라며 받아서 손재흥을 방문하기로 했다.[[http://db.history.go.kr/id/hd_033r_0030_0140|#]] 그해 6월 6일경 손재흥을 방문하여 정말 프랑스정부에 1,000원을 납부하면 7년간 공부할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, 사리원 독립청년단 단장 손재흥은 상해에 가는 데에는 여비가 120원이므로 다만 1,000원만으로는 부족하므로 그 돈으로 차라리 상해임시정부에 금 500원을 기부하라고 했다. 신표성은 처음에는 기부할 수 없다고 거절했으나 손재흥이 상해임시정부 간부 [[손정도]]를 알고 있다며 그 분을 소개해주겠노라 하여 결국 돈을 기부하였다. 같은 해 7월 20일 손재흥과 함께 [[평안남도]] [[중화군]] 중화면 석전리에 있는 [[http://e-gonghun.mpva.go.kr/user/ContribuReportDetail.do?goTocode=20001&mngNo=40527|김태용]](金泰鏞)의 집으로 가서 김치은(金致殷) 등과 회합한 자리에서, 김태용·김치은과 함께 그동안 모집한 독립운동자금을 임시정부로 보내는 임무를 맡았다. 이를 위해 [[평안북도]] [[의주군]] 위화면 북하동의 선착장에서 임시정부 파견원 [[최명식]]을 만나기로 했다. 같은 해 8월 1일 김태용·김치은과 함께 [[순안구역|순안]]·[[숙천군|숙천]]·[[박천군|박천]]·[[정주시|정주]]·[[선천군|선천]] 등지를 거쳐 의주에 도착하였다. 하지만 다음날인 8월 2일 임시정부 재무원 최명식을 기다리던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. 이에 1920년 8월 12일 해주지방법원 서흥지청 검사분국을 거쳐 8월 30일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 예심이 청구되었다. 같은 해 12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예심이 종결되어, 이듬해인 1921년 5월 1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정치범죄 처벌령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(미결 구류일수 중 200일 본형에 산입)을 언도받고[[http://theme.archives.go.kr/next/indy/viewIndyDetail.do?archiveId=0001351926&evntId=0034974607&evntdowngbn=Y&indpnId=0000006796&actionType=det&flag=1&search_region=|#]]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같은 해 10월 29일 출옥하였다. 출옥 후 행적 및 사망년월일 등에 대해선 자료가 미비하여 알 수 없다. 201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. == 논산시 출신 독립운동가, 愼杓晟 == ||||<table align=right><bgcolor=white><:>[[파일:신표성(논산 독립운동가).png|width=300px]][* 1926년 8월 5일, 제2차 조선공산당 사건에 연루, 체포되었을 때 종로경찰서에서 촬영된 사진.] || || 성명 ||신표성(愼杓晟) || || 호 ||운곡(雲谷) || || 본관 ||[[거창 신씨]][* 참의공파 30세손 '''성(晟)''' 성(珹) 항렬.] || || 생몰 ||[[1897년]] [[3월 8일]] ~ [[1947년]] [[10월 16일]] || || [[출생지]] ||[[충청남도]] 연산군 모촌면 남산리[br](현 충청남도 [[논산시]] 양촌면 남산리) || || 추서 ||건국포장 || 신표성(愼杓晟)은 1897년 3월 8일 충청남도 연산군 모촌면 남산리(현 논산시 양촌면 남산리)의 양반 집안[* [[http://db.history.go.kr/id/ia_2839_2200|1928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]]에는 출생지가 논산군 노성면, 신분이 '상민(常民)'으로 기재되어 있다.]에서 아버지 신영흡(愼寧洽)[* 1908년 11월 16일 공립 은진보통학교 전과 부훈도에 제수되었다.[[http://db.itkc.or.kr/inLink?DCI=ITKC_ST_ZA_A02_11A_16A_00030_2015_004_XML|#]] 1910년 3월 18일 사직하였다.[[http://db.itkc.or.kr/inLink?DCI=ITKC_ST_ZA_A04_03A_18A_00040_2015_006_XML|#]]]과 어머니 [[파평 윤씨]] 사이의 3남 2녀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. 위로 형 신채성(愼彩晟)[* 1879년 1월 6일생. 1909년 기호흥학회에서 세운 [[중앙고등학교|기호학교]] 특별과에 재학 중이었다.[[http://db.history.go.kr/id/ma_005_0090_0250|#]] 당시 기호흥학회에 금 1환을 의연하기도 했다.[[http://db.history.go.kr/id/ma_005_0120_0280|#]] 이후 [[중앙고등학교|중앙고등보통학교]]를 졸업하고 1916년 5월 충청남도 사립학교 교원시험에 합격하였다.[[http://db.history.go.kr/id/gb_1916_06_17_a11610_0340|#]] 1920년 10월 소학교 및 보통학교 교원 제3종 시험에 합격하여[[http://db.history.go.kr/id/gb_1920_12_14_a25030_0190|#]] 양촌공립보통학교에 발령받아 1921년부터 1922년까지 부훈도를, 1923년부터 1926년까지는 훈도를 역임하는 등[[http://db.history.go.kr/search/searchResultList.do?sort=&dir=&limit=20&page=1&pre_page=1&setId=6&totalCount=6&kristalProtocol=&itemId=jw&synonym=off&chinessChar=on&searchTermImages=%E6%84%BC%E5%BD%A9%E6%99%9F&brokerPagingInfo=&searchKeywordType=BI&searchKeywordMethod=EQ&searchKeyword=%E6%84%BC%E5%BD%A9%E6%99%9F&searchKeywordConjunction=AND|#]] 10여년간 교원 생활을 하였다. 이후 대전시 인동(현 [[대전광역시]] [[동구(대전)|동구]] [[인동(대전)|인동]]) 이주하여 40년간 의원을 경영하였고 슬하에 4남을 두었다. 이후 충남의약협회장 및 한약종상 재교육 강사 촉탁 등을 역임하였다.[[http://db.history.go.kr/id/im_107_20511|#]]]과 신기성(愼杞晟)[*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에 근무하면서, 1911년부터 1913년까지 동 직장에서 측량과 기수로, 1914년 측지과 서기로, 1915년에는 측지과 기수, 1916년에는 측지과 기수보로 근무하였다.[[http://db.history.go.kr/search/searchResultList.do?sort=&dir=&limit=20&page=1&pre_page=1&setId=6&totalCount=6&kristalProtocol=&itemId=jw&synonym=off&chinessChar=on&searchTermImages=%E6%84%BC%E6%9D%9E%E6%99%9F&brokerPagingInfo=&searchKeywordType=BI&searchKeywordMethod=EQ&searchKeyword=%E6%84%BC%E6%9D%9E%E6%99%9F&searchKeywordConjunction=AND|#]]]이 있었으며, 이후 가족이 모촌리로 이주하여 농업에 종사하며 살았다.[[http://db.history.go.kr/id/had_207_0020_1680|#]] 그는 일찍이 상경하여 [[서울대학교/학부/사범대학|경성고등보통학교 부설 교원양성소]] 제1부[* 3년 과정]에 입학, 1914년 졸업하였다. 같은 해 4월 1일, 공립보통학교 훈도에 임명되어[[http://db.history.go.kr/id/gb_1914_04_06_a05020_0290|#]] 전라북도 진산공립보통학교에 발령받은 것을 시작으로, 1917년부터 1918년까지 군산공립보통학교 훈도, 1919년 충청남도 연산공립보통학교 훈도, 1921년부터 1922년까지 강경공립보통학교 훈도를 역임하는 등 10여년간 교원생활을 했다.[[http://db.history.go.kr/search/searchResultList.do?sort=&dir=&limit=20&page=1&pre_page=1&setId=6&totalCount=6&kristalProtocol=&itemId=jw&synonym=off&chinessChar=on&searchTermImages=%E6%84%BC%E6%9D%93%E6%99%9F&brokerPagingInfo=&searchKeywordType=BI&searchKeywordMethod=EQ&searchKeyword=%E6%84%BC%E6%9D%93%E6%99%9F&searchKeywordConjunction=AND|#]] 그러다가 사회주의 사상에 눈을 떠 교사직에서 은퇴하고 이후 서울청년회 및 경성노동회(京城勞動會) 등에 가입하여 대중운동과 사회운동을 통한 항일투쟁에 참여하기 시작했다. 1925년 1월 20일 군산청년회·군산노동연맹회·민중운동사가 연합 주최한 [[레닌]] 1주기 추도강연회[* [[블라디미르 레닌]]은 1924년 1월 21일 사망하였다.]에서 '朝鮮(조선) 農村(농촌)에서 본 레닌'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하였다.[[http://db.history.go.kr/id/npda_1925_01_21_v0003_0750|#]] 같은 해 4월 전조선노농대회(全朝鮮勞農大會) 준비위원 및 자격심사위원이 되었고, 또 조선사회운동자동맹(朝鮮社會運動者同盟) 상무위원에 취임하였으며, 전진회(前進會) 및 국제청년의 날 기념협의회 준비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. 이 무렵 [[모스크바]] 공산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[[중국]] [[상하이]]로 갔다가 [[조선공산당]]에 가입하였다. 1926년 2월 귀국하여, 같은 해 3월 조선공산당 [[대전광역시|대전]] 야체이카[* 세포조직] 책임자가 되었다. 그러나 그는 같은 해 7월 25일 제2차 [[조선공산당]] 사건에 연루, 체포되어 [[종로경찰서]]에 유치되었다가[[http://db.history.go.kr/id/ia_2838_2200|#]] 10일부터 [[서대문형무소]]에 구금되었으며[[http://db.history.go.kr/id/had_207_0020_0740|#]], 1928년 2월 1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[[치안유지법]] 위반으로 징역 1년형(미결 구류일수 중 150일 통산)을 언도받고[[http://theme.archives.go.kr/next/indy/viewIndyDetail.do?archiveId=0001165243&evntId=&evntdowngbn=N&indpnId=0000115836&actionType=det&flag=2&search_region=|#]] 옥고를 치렀다. [[파일:신표성(논산 독립운동가)2.png]] || 1928년 2월 18일, [[서대문형무소]]에서 촬영된 사진 || 1928년 9월 16일 출옥하였는데, 9월 18일 조선공산당 동지들이 당일 출옥한 20여 명의 출감자 환영회를 식도원(食道園)에서 개최하려다 금지당하는 일도 있었다.[[http://db.history.go.kr/id/su_008_1928_09_18_0680|#]] 1930년 2월 3일, 동아일보사 논산지국에서 논산군 양촌면 인천리에 양촌분국을 설치하자 신표성은 고문에 임명되었다.[[http://db.history.go.kr/id/npda_1930_02_03_v0003_0730|#]] 1932년 5월경 논산군 양촌면 인천리에서 농민 70여명이 머슴계를 조직하고자 양촌주재소에 집회신청을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, 흥분한 군중들이 적기를 흔들며 주재소를 습격하는 등 격렬히 항쟁하였던, 이른바 적기 시위사건이 있었다. 이때 이들을 선동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그해 8월 30일 대전지검 강경지청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에 대해 [[무혐의]]로 [[불기소처분]]을 받고 곧 석방되었다.[[http://theme.archives.go.kr/next/indy/viewIndyDetail.do?archiveId=0001165279&evntId=&evntdowngbn=N&indpnId=0000135924&actionType=det&flag=4&search_region=|#]] 그는 1933년 9월 20일경에도 양촌면에서 소작계를 조직해 농민을 선동하고 의식화했다는 혐의로 강경경찰서에 또 다시 체포되기도 하였다.[[http://db.history.go.kr/id/npda_1933_10_03_x0003_1660|#]] 이후 조용히 지내다가 1944년 [[여운형]]의 [[건국동맹]]에 참여하여 충청남·북도지부 책임자로 선정되어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계속하던 중 [[8.15 광복]]을 맞았다. 해방 후 1946년 [[여운형]]·[[백남운]] 등과 함께 [[사회노동당]] 창당에 관여하여 그해 11월 12일 개최된 임시중앙위원회에서 상임중앙위원 선임을 위한 전형위원에 선출되었다.[[http://db.history.go.kr/id/dh_003_1946_11_12_0110|#]] 11월 15일에는 상임위원 및 농민부 책임위원에 선임되었으며[[http://db.history.go.kr/id/dh_003_1946_11_15_0100|#]], 같은 날 개최된 제1회 상무위원회에서 공산당대회파 상임위원에 선임되었다.[[http://db.history.go.kr/id/dh_003_1946_11_15_0110|#]] 그러나 정세상 사회노동당이 불리해지자 탈당하고 [[남조선로동당]]에 입당하였다. 1947년 10월 [[미군정]] 포고령 위반으로 검거되어 취조 도중 병세가 악화되어 10월 16일 [[충남대학교병원|충청남도 도립의료원]]에서 별세하였다.[[https://terms.naver.com/entry.nhn?cid=51928&docId=2594653&categoryId=54110|#]] 2009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.