[[분류: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]][[분류:한국의 독립운동가]][[분류:동명이인/ㅅ]] [목차] == 영변군 출신 독립운동가, 신태익 == || 성명 ||신태익(申泰翼) || || 생몰 ||? ~ [[1924년]] || || [[출생지]] ||[[평안북도]] [[영변군]] || || 사망지 ||[[만주]] || || 추서 ||건국훈장 애국장 || 신태익은 평안북도 영변군 출신으로 알려졌지만 출생년도는 알 수 없다. 그는 1919년 4월 [[박장호]], [[조맹선]] 등이 중심이 되어 대한독립단(大韓獨立團)을 결성하고 국내에 지단을 설치할 때 평북 영변지단 단장으로 임명되어 군자금 모집 활동을 수행했다. 1922년 8월 환인현 남구 마권자에서 남만한족통일회가 개최도어 남만주 일대 독립군단체를 통합하여 대한통의부(大韓統義府)를 창설하자, 그는 대한통의부 교통부 부감으로 선임되었다. 그러나 [[대한민국 임시정부]] 개조를 둘러싸고 마찰이 일어난 끝에 대한통의부 내 임시정부 지지세력이 1923년 8월 참의부를 조직하면서 통의부와 참의부 간의 갈등이 첨예해졌다. 이에 통의부는 [[편강렬]] 등이 조직한 의성단(義誠團)과 연합하기 위해 신태익을 의성단에 파견했다. 그러나 1924년경 의성단을 방문하여 군인 7명과 무기 10정을 지원받고 돌아오던 중 중국인 병사들의 공격을 받아 피살되었다. 대한민국 정부는 2012년 신태익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. [[분류:영변군 출신 인물]][[분류:생년 미상]][[분류:1924년 사망]][[분류:건국훈장 애국장]] == 신흥군 출신 독립운동가, 신태익 == || 성명 ||신태익(申泰益) || || 생몰 ||[[1898년]] [[5월 8일]] ~ [[1986년]] [[9월 5일]] || || [[출생지]] ||[[함경남도]] [[신흥군]] 신흥면 중흥리 || || 사망지 ||[[서울특별시]] || || 매장지 ||[[국립대전현충원]] 독립유공자 묘역 || || 추서 ||건국훈장 애족장 || 신태익은 1898년 5월 8일 함경남도 신흥군 신흥면 중흥리에서 태어났다. 그는 1939년 5월 28일 일본에서 의원들로 구성된 전국경제조사시찰단이 함흥에 도착했을 때 이들을 위한 환영회에 함흥변호사회 회장 자격으로 참석했다. [[동아일보]] 1919년 6월 25일자 기사에 따르면, 그는 연설자로 나와서 일본의 동화정책(同化政策)의 부당성과 한글 사용 금지, [[창씨개명]] 등의 일제 식민정책을 비판하는 한편, 지원병제도에 대해서도 비판하였다고 한다. 또한 한국인이 일본에 동화(同化)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망상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. 이 일로 체포된 그는 1939년 6월 30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으로 징역 1년을 받았으나, 공소하여 같은 해 7월 25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8월로 감형받고 함흥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. 출옥 후 또 다시 일본의 한국에 대한 정책의 부당함을 공격하다가, 1943년 다시 일경에 붙잡혀, 소위 육해군형법 등으로 징역 8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. [[8.15 광복]] 후에는 1949년 [[반민특위]] 제1부 재판장을 역임하기도 하였으며, 이후엔 서울에서 조용히 지내다 1986년 9월 5일에 사망했다. 대한민국 정부는 1996년 신태익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. 그리고 1997년 그의 유해를 [[국립대전현충원]]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. [[분류:신흥군 출신 인물]][[분류:1898년 출생]][[분류:1986년 사망]][[분류:건국훈장 애족장]][[분류: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]]