||<-2><tablealign=right><tablebordercolor=#0047a0><tablewidth=450><tablebgcolor=#fff,#1f2023> 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; padding: 5px 10px; background-image: linear-gradient(115deg, #cd313a 50%, #0047a0 50%)" '''[[독립유공자|{{{#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}}}]]'''[br]{{{#FFFFFF '''{{{+1 신용기}}}'''[br]'''辛容祺'''}}}}}} || ||<-2> [[파일:신용기2.png|width=100%]] || ||<colcolor=#fff><colbgcolor=#0047a0><width=30%> '''이명''' ||신용기(辛容琪, 辛容箕)·신철(辛鐵, 申鐵) || || '''본관''' ||[[신(성씨)|영산 신씨]] || ||<|2> '''출생''' ||[[1901년]][* [[http://db.history.go.kr/id/ia_2807_2177|1929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]]에는 1900년생으로 기재되어 있다.] [[6월 1일]] || ||[[경상남도]] [[거제시|거제군]] [[하청면]] 하청리[* [[신(성씨)|영산 신씨]] 집성촌이다.] || || '''사망''' ||[[1948년]] [[5월 14일]] || || '''상훈''' ||건국포장 || [목차] [clearfix] == 개요 == 한국의 [[독립운동가]]. 2008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. == 생애 == 신용기는 1901년 6월 1일 경상남도 거제군(현 거제시) 하청면 하청리의 평민 집안에서 신주병(辛周柄)의 차남으로 태어났다. 일찍이 상경하여 [[경성부]] 죽첨정1정목(현 [[서울특별시]] [[중구(서울)|중구]] [[충정로1가]])과 장교정(현 중구 [[장교동]]), 황금정4정목(현 중구 [[을지로4가]]), 원정2정목(현 [[용산구]] 원효로2가), 관철동(현 [[종로구]] 관철동) 등지에 거주했으며, 1919년에 잠깐동안 [[대구광역시|대구부]] 덕산정(현 [[대구광역시]] [[중구(대구)|중구]] 덕산동)에 거주한 적도 있다. 어려서 [[중국]] [[만주]] [[북간도]]로 건너가 그곳의 사숙에서 한문을 배우다가, 다시 귀국하여 고향에서 거제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곧 상경하여 경성부 [[양정고등학교(서울)|양정고등보통학교]] 3학년 재학 중에 중퇴하였다. 다시 북간도로 건너간 그는 [[연길시|국자가]](局子街)[* 중국 [[옌볜 조선족 자치주]] [[옌지 시]]의 옛 이름이다.] 길림성립사범학교(吉林省立師範學校)[* 현 연길시제1고급중학(延吉市第一高級中學).[[https://baike.baidu.com/item/%E5%BB%B6%E5%90%89%E5%B8%82%E7%AC%AC%E4%B8%80%E9%AB%98%E7%BA%A7%E4%B8%AD%E5%AD%A6|바이두백과 연길시제1고급중학]]] 속성과[* 3개월 과정]을 졸업하였다. 이후 [[상하이]] 중국공학(中國公學)[* 1906년 상하이에 설립된 대학으로, 1932년 [[제1차 상하이 사변]] 때 일본군의 포격으로 파괴된 후 1937년 [[충칭]]에서 재개교하였으며, 1951년 충칭재경학원(重慶財經學院)과 합병되어 서남인민혁명대학(西南人民革命大學)이 되었다. 서남인민혁명대학은 현재 서남정법대학(西南政法大學)으로 남아 있다.[[https://baike.baidu.com/item/%E4%B8%AD%E5%9B%BD%E5%85%AC%E5%AD%A6|바이두백과 중국공학]]]을 6개월 다니다가, [[난징]] 중화민국대학원(中華民國大學院)[* [[차이위안페이]]가 초대 교장으로 있었다.] 정치경제과에 편입하여 1년을 다니다가 중퇴하였다. 곧 다시 상해 법률전문학교[* 1926년 설립된 상해법과대학(上海法科大學)으로 추정된다. 이후 상해법학원(上海法學院)으로 교명을 변경하여 법과 이외에도 정치·경제·회계·은행 등의 학과를 신설하였으나, 1949년 5월 27일 [[국공내전#s-3.3.8|제2차 국공내전]] 때 상하이가 함락된 직후 폐교되어 법과는 상해재정경제학원에 합병되었고, 다른 학과들은 상해학원에 합병되었다.[[https://baike.baidu.com/item/%E4%B8%8A%E6%B5%B7%E6%B3%95%E5%AD%A6%E9%99%A2/10816979|바이두백과 상해법학원]]] 법과에 전학하였으나 마찬가지로 2년을 수료하고 중퇴하였으며, 마지막으로 1922년 4월 [[일본]]으로 유학하여 [[도쿄]]의 [[메이지대학]] 경제과에 입학하였다가 2개월을 다니던 중 중퇴하면서 마침내 학업을 포기하였다.[[http://db.history.go.kr/id/im_107_01105|#]] 이 사이 1919년 3월 보안법 위반 혐의로 투옥되었다가 같은 달 24일 대구지검에서 [[기소유예]]로 [[불기소처분]]을 받고 출옥한 바 있다.[[http://theme.archives.go.kr/next/indy/viewIndyDetail.do?archiveId=0001165911&evntId=&evntdowngbn=N&indpnId=0000121283&actionType=det&flag=3&search_region=|집행원부 기록]][[http://theme.archives.go.kr/next/indy/viewIndyDetail.do?archiveId=0001165596&evntId=&evntdowngbn=N&indpnId=0000137277&actionType=det&flag=4&search_region=|형사사건부 기록]] 투옥된 사유는 알 수 없으나, [[3.1 운동]] 관련으로 생각된다. 같은 달 북성회(北星會)의 김찬(金燦)과 만나 [[러시아]] [[이르쿠츠크]]의 [[고려공산당]] 총국과 연락하였다가 이르쿠츠크로 건너가서 조국 독립과 신사회 건설을 목적으로 고려공산당에 입당하였고, [[소련]]이 설립한 이르쿠츠크 군정학교에 입학하여 졸업하였다. 졸업 후 [[블라디보스토크]] 방면을 전전하다가 1923년 3, 4월경 [[코민테른]] 극동총국 민족부 산하 고려국, 즉 꼬르뷰로의 국내 공작원에 선임되어 공산주의 선전비 2,000엔을 받아 [[경성부]]에 잠입하였다. 그후 김찬의 집에 임시로 머물면서 잡지 <신민사(新民社)> 기자를 가장하며 살았다. 이때 [[세브란스병원]]에서 간호부로 일하며 사회주의운동에 참여하던 [[정종명]]과 알게 되어 연인관계로 발전하였다. 같은 해 4월 경성부에서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총국 책임비서가 되었으며, 이때부터 [[김재봉(독립운동가)|김재봉]]·김찬·[[신백우]]·윤덕병(尹德炳)·원우관(元友觀)·이영(李英) 등과 비밀결사 조직을 토의하였다. 그해 6월경 서울청년회계를 제외한 화요회(火曜會)와 북풍회(北星會) 간부들과 함께 경운동(현 [[종로구]] [[경운동]]) 김찬의 집에 모여서 꼬르뷰로 국내부를 조직하고 그 위원이 되었다. 그해 7월경에는 다시 [[블라디보스토크]]로 가서 후기 청년뷰로와 그 경과를 [[이동휘]]·정재달(鄭在達)·한명서(韓明瑞)에게 보고하고 귀국하였다. 그해 여름, 이호(李浩)·민태흥(閔泰興)과 함께 토요회(土曜會)를 조직하여 공산주의 선전 활동을 전개했으며, 조선 전역 각지의 유력자들과 밀약을 통해 공산주의 선전을 공동으로 할 것을 결의하였다. 같은 해 9월에는 여자고학생상조회(女子苦學生相助會) 회장 정종명과 같이 [[경상남도]] 지역을 순회하며 강연하던 중, 그달 22일 [[김해시|김해]]에서 종로경찰서 출장원에게 공산주의 선전 혐의로 체포되어 구류 15일 처분을 받았다가[[http://db.history.go.kr/id/npda_1923_09_29_v0003_0650|#]], 11월 2일 [[무혐의]]로 방면되었다.[[http://db.history.go.kr/id/npda_1923_11_03_v0003_0610|#]] 1924년 2월 10일에는 [[조봉암]]·[[http://e-gonghun.mpva.go.kr/user/ContribuReportDetail.do?goTocode=20001&mngNo=2569|백광흠]](白光欽)·[[박일병]]·이호·민태흥·최현(崔鉉)·윤덕병 등과 함께 토요회와 무산청년회(無産靑年會)를 합병하여 신흥청년동맹을 조직하고 창립총회에서 '조선청년총동맹'조직을 위한 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. 같은 해 3월,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직에서 [[사보타주]] 혐의로 해임되었다. 4월에는 조선 공산주의 운동의 통일을 위해 개최된 '13인회'에 참석했고, 7월에는 해방운동사(解放運動社) 결성에 참여했다. 9월 20일에는 [[최창익]]·[[김병로]]·[[이승훈(1864)|이승훈]]·[[한용운]]·[[이상재]]·[[안재홍]] 등과 함께 종로중앙청년회관에서 개최된 기근대책대연설회(飢饉對策大演說會)에 참여, 연사로 나섰으며[[http://db.history.go.kr/id/su_007_1924_09_20_0790|#]], 11월에는 [[김약수]]·송봉우(宋奉禹)·김종범(金鍾範) 등과 함께 북풍회(北風會) 결성에 참여하여 집행위원이 되었다.[[https://terms.naver.com/entry.nhn?cid=40942&docId=1232274&categoryId=33384|#]] 1925년 1월 24일 [[평양]] 각 사상단체의 연합 주최로 평양천도교당 내에서 개최된 노동운동자간친회(勞動運動者懇親會)에 참가하였다.[[http://db.history.go.kr/id/su_007_1925_01_24_1100|#]] 4월에는 [[조선공산당]]에 입당하였으며, 6월 조선공산당의 코민테른 가입 문제에 대한 북풍회의 견해를 제출하기 위해 [[모스크바]]로 건너가 10월경 도착하였다. 그러나, 11월 조선공산당내에서 북풍회의 종파행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권한 정지 처분을 받았다. 1926년 1월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북풍회 공산주의자그룹의 연락책임자로 일했다. 5월경,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의 이제(李濟)의 집에서 [[채성룡]]·[[http://e-gonghun.mpva.go.kr/user/ContribuReportDetail.do?goTocode=20001&mngNo=42124|정운해]](鄭雲海)와 함께 국내에 들어와 [[사유재산]]제도를 부인하고 신사회를 실현시키기 위해 방법을 협의하였다. 그후 귀국하여 북풍회 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으며, 8월 경남 [[마산]]의 사각동맹(四角同盟) 회원 김상주(金尙珠) 등 4명에게 공산주의 사상을 전파하고, 동지의 일치단결을 강조하기도 하였다. 이 일로 신용기는 검찰에 기소되었으나, 소재 불명으로 기소중지되었다. 그러나 결국 1928년 5월 8일 체포되어[[http://db.history.go.kr/id/had_124_1200|#]] 그해 11월 19일 공판에 회부되었으며[[http://db.history.go.kr/id/tcmd_1928_11_19_0020|#]], 1929년 2월 2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[[치안유지법]]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(미결구류 150일 통산)[* 다만, 김재봉 외 12명에게 조선공산당에 가입시켜 당원이 되었다는 점은 무죄를 인정받았다.]을 언도받아[[http://theme.archives.go.kr/next/indy/viewIndyDetail.do?archiveId=0001351740&evntId=0034982087&evntdowngbn=Y&indpnId=0000013731&actionType=det&flag=1&search_region=|#]] [[서대문형무소]]에서 옥고를 치르고 1930년 9월 28일 만기출옥하였다.[[http://db.history.go.kr/id/su_009_1930_09_28_1390|#]] ||<tablealign=center> [[파일:신용기.png|width=300]] || || 1929년 2월 25일, [[서대문형무소]]에서 촬영된 사진. || 이후 [[신간회]] 해소위원으로 있으면서 정희찬(鄭喜燦)·정종명 등 16명과 함께 1931년 4월 23일, 노동무산소년동맹을 조직하여 [[어린이날]]에 거사를 일으킨다는 모종의 비밀결사 사건에 연루되어 용산경찰서에 체포되었다가[[http://db.history.go.kr/id/npda_1931_04_28_v0002_0340|#]] 같은 해 7월 2일 석방되었다.[[http://db.history.go.kr/id/npda_1931_07_04_v0002_0320|#]] 이어 8월 초 종로경찰서 관내 학생 격문 사건에 연루되어 검거되었다가[[http://db.history.go.kr/id/npda_1931_08_01_v0002_0290|#]] 8월 23일 [[무혐의]]로 석방되었다.[[http://db.history.go.kr/id/npda_1931_08_25_v0002_0160|#]] 이후 고향 거제에 내려와 한의사로서 의료봉사에 전념하였다.[[https://www.geoje.go.kr/index.geoje?menuCd=DOM_000008505004000000|#]] 1938년 6월경에는 정식으로 의사면허를 얻어 경상남도에서 병원을 개업했으나 1941년 1월 30일 폐업하였다. 이후 조용히 지내던 중 [[8.15 광복]]을 맞았다. 해방 후 잡지사를 경영했으며 1945년 11월 [[조선인민당]] 결성에 참여하여 중앙정치위원으로 선출되는 한편, 1946년 8월 5일 조선인민당 중앙집행위원회에서 [[신민당|조선신민당]]과 [[조선공산당]]에 정식으로 합당을 제안하는 결의안이 가결되었을 때, [[여운형]]·[[장건상]] 등과 함께 합당교섭위원에 선임되기도 했다.[[http://db.history.go.kr/id/npfp_1946_08_05_v0001_0090|#]] 정치활동을 하다가 1948년 5월 14일 별세하였다. 2008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.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8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. == 여담 == * 여담으로, 형 신용우(辛容禹)[* 초명 신용만(辛容萬)[[http://db.history.go.kr/id/im_107_01105|#]], 일본식 성명 白山容禹.]는 1937년부터 1940년까지 통영군 하청면장을 지내고, 해방 후 1952년 경상남도의회 의원을 지낸 인물[[http://db.history.go.kr/search/searchResultList.do?sort=&dir=&limit=20&page=1&pre_page=1&setId=4&totalCount=4&kristalProtocol=&itemId=jw&synonym=off&chinessChar=on&searchTermImages=%E8%BE%9B%E5%AE%B9%E7%A6%B9&brokerPagingInfo=&searchKeywordType=BI&searchKeywordMethod=EQ&searchKeyword=%E8%BE%9B%E5%AE%B9%E7%A6%B9&searchKeywordConjunction=AND|#]]로서, [[아이러니]]하게도 동생과는 달리 일제 말 지방 유지로서 국민정신총동원연맹 통영군 하청면 이사장, 국민총력통영연맹 하청면 이사장을 지내는 등 친일단체에 가입하였으며 1937년 12월 15일 애국전투기 헌납운동에 면장으로서 참여하여 애국전투기를 '경남호'로 명명하고 통영 유지들에게 10,400여원의 헌금을 모집하고 1939년 4월 26일 거제 육군지원병 후원회에 평의원으로 선출되는 등 일제 협력 행적이 있다.[[http://www.geojetimes.co.kr/news/articleView.html?idxno=8464|#]] [[분류: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]][[분류:한국의 사회주의 독립운동가]][[분류:한국의 공산주의자]][[분류:거제시 출신 인물]][[분류:영산 신씨]][[분류:1901년 출생]][[분류:1948년 사망]][[분류:건국포장]]