[[분류:조선의 후궁]] [include(틀:조선의 후궁(환조 ~ 연산군))] ||<-3><tablealign=right><tablewidth=400><tablebordercolor=#C23352><tablebgcolor=#fff,#1f2023> 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; padding: 7px 10px 5px; background-image: linear-gradient(to right, #C23352 0%, #C23352 20%, #C23352 80%, #C23352)" '''{{{#ffd400 조선 태종의 후궁[br]{{{+1 신순궁주 이씨 | 愼順宮主 李氏 }}}}}}'''}}} || ||<width=50><bgcolor=#C23352> '''{{{#gold 본명}}}''' ||<-2>정민(正敏)|| ||<bgcolor=#C23352> '''{{{#gold 출생}}}''' ||<-2>미상 || ||<bgcolor=#C23352> '''{{{#gold 사망}}}''' ||<-2>미상 || ||<bgcolor=#C23352> '''{{{#gold 본관}}}''' ||<-2>[[성주 이씨|성주(星州)]] || ||<bgcolor=#C23352> '''{{{#gold 부모}}}''' ||<-2>부친 이직(李稷) 모친 양천 허씨 || ||<bgcolor=#C23352> '''{{{#gold 부군}}}''' ||<-2>[[태종(조선)|태종]] || [목차] == 개요 == [[조선]] [[태종(조선)|태종]]의 간택 후궁. 태종이 왕위에서 물러나 태상왕으로 있을 때 뽑혀 들어왔다. 그녀의 아버지는 여말선초에 활동한 이직이며, 어머니는 허시의 딸 양천 허씨이다. 또한, 언니가 [[민무휼]]의 처였다. == 생애 == 1422년([[세종대왕|세종]] 4년), 33세의 나이로 신순궁주로 책봉되었다. 당시 태종이 상왕으로 있었는데, [[세종(조선)|세종]]이 부왕을 위해서 간택하였다.[* 세종실록 15권, 세종 4년 1월 6일 갑자 2번째기사. [[http://sillok.history.go.kr/id/kda_10401006_002|#]] ] 사실 신순궁주는 혼인하였다가 일찍 과부가 된 처지였는데, 조선 초기라서 이러한 일이 용납되었다.[* 조선 초기에는 과부 출신, 기생 출신 후궁들이 보이지만 후대로 갈수록 후궁 선발에도 엄격해져 궁녀 출신은 있어도 과부나 기생은 찾아볼 수 없다. ] 후궁으로 궁에 들어온 지 한 달 후에 신순궁주로 책봉되었다. 당시에 그녀의 아버지 이직은 [[원경왕후]]의 친정 가문이 몰락하는 중에 휘말려 성주 지방으로 유배를 간 상황이었다.[* 민무휼과 사돈 가문인 것도 한몫했다. ] 그런데 딸이 태종의 후궁 된 덕분에 유배에서 풀려났으며, 직첩과 공신 녹권까지 돌려주었다. 태종은 이직의 딸 때문이 아니라고 하였지만, [[사헌부]] 등에서는 태종의 말을 믿지 않았는지 이직을 처벌하라고 재차 간언하였다.[* 세종실록 15권, 세종 4년 1월 14일 임신 3번째기사. [[http://sillok.history.go.kr/id/kda_10401014_003|#]] ] [[영의정]] 유정현까지 나섰으나 처벌하지 않았고, 이듬해 이직은 성산부원군에 제수되었다. == 여담 == * 신순궁주는 [[명빈 김씨]], [[소빈 노씨]] 등과 함께 태종과 [[원경왕후]], [[소헌왕후]] 및 부모의 명복을 빌기 위해 《상교정본자비도량참법(권9~10)》[* 자비도량참법은 [[양무제]]가 생전에 죄를 지어 [[구렁이]]로 태어난 황후 치씨의 고통을 구제하고자 편찬한 것이다. 특히 권9~10의 내용은 살아가면서 짓는 온갖 죄, 원한을 참회하고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하여 영혼을 극락으로 천도하는 의미다. ]을 발원하였다. 여기에 그녀의 이름이 '신순궁주 정민(愼順宮主 正敏)'으로 기록되어 있다.