[[분류: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]][[분류:한국의 독립운동가]][[분류:한국의 사회주의 독립운동가]][[분류:건국훈장 애족장]][[분류:거창 신씨]][[분류:거창군 출신 인물]][[분류:1920년 출생]][[분류:1998년 사망]] || 성명 ||<(> 신숙범(愼淑範) || || 일본식 성명 ||<(> 悳山淑範 || || 이명 ||<(> 신진민(愼陳民) || || 본관 ||<(> [[거창 신씨]][* 현령공파 31세 범(範) 항렬.] || || 생몰 ||<(> [[1920년]] [[6월 13일]] ~ [[1998년]] [[1월 1일]] || || [[출생지]] ||<(> [[경상남도]] [[거창군]] 가동면 마상리[br](현 경상남도 거창군 가조면 마상리) || || 사망지 ||<(> [[대구광역시]] [[수성구]] [[만촌동]] || || 추서 ||<(> 건국훈장 애족장 || [목차] == 개요 == 한국의 [[독립운동가]].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. == 생애 == 신숙범은 1920년 6월 13일 경상남도 거창군 가동면(현 가조면) 마상리의 빈농 가정에서 아버지 신원성(愼元晟)[* [[곽종석]]의 문하생이었다고 한다.]과 어머니 [[송(성씨)|은진 송씨]] 송석명(宋錫明)의 딸 사이의 6형제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. 고향에서 가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상경하여 [[경성부]] 화동정(현 [[서울특별시]] [[종로구]] [[화동]])으로 이주하였다. 1936년 4월 [[경기고등학교|경기중학교]]에 입학하여 다니다가 1939년 11월 학자금 부족 및 실연 등의 이유로 중퇴하였다. 그는 중학교 중퇴 후 [[만주]]로 건너가 방랑하던 중, 재만 한인 동포들의 참혹한 생활상을 목격한 후 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결심하고 1940년 5월 귀국하였다. 이때 경성부로 돌아와서는 경성부청 위생과부 임시 고용인으로 취직하여 1달간 근무했고 그해 12월 2일부터 경성부 본정1정목(현 서울특별시 [[중구(서울)|중구]] [[충무로1가]])에 있던 '삼영 캔디스토아'의 배달부로 근무했다. 그리하여 1940년 10월 송택영(宋澤永)·[[http://e-gonghun.mpva.go.kr/user/ContribuReportDetail.do?goTocode=20001&mngNo=962279|임원빈]](任元彬)[* 일본식 성명 : 豊川元彬.] 등의 동지와 함께 조국 독립과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을 위해 비밀결사 조선인해방투쟁동맹(朝鮮人解放鬪爭同盟)을 조직하였다. 이들은 조국독립을 위해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가 이념을 초월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보았다. 이후 이들은 조선인해방투쟁동맹의 선언문을 작성하고 기관지도 발행하기로 결정한 후 조직 확대에 힘쓰던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. 그는 1942년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[[치안유지법]] 위반으로 징역 4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, 옥중에서 [[8.15 광복]]을 맞아 출옥하였다.[[http://theme.archives.go.kr/next/indy/viewIndyDetail.do?archiveId=0001352006&evntId=0034970063&evntdowngbn=Y&indpnId=0000002542&actionType=det&flag=1&search_region=|#]] 출옥 후 [[경상북도]] [[대구광역시|대구부]]로 내려가 살다가 1998년 1월 1일 별세하였다. 197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수여되었고,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수여되었다.