信誠 (? ~ ?) [목차] == 개요 == [[고구려]] 말기의 ~~[[땡중]]~~ [[승려]]. == 생애 == [[연개소문]]의 아들이었던 [[연남건]]의 심복으로, 승려임에도 불구하고 군사에 대한 업무를 주로 담당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.[* 혹자는 이것을 고구려에 [[승병]]이 존재했다는 근거로 제시하기도 한다.] [[668년]], [[당나라]]의 [[명장]]이었던 [[이세적|이적]]이 [[글필하력|계필하력]] 등과 더불어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의 [[수도(행정구역)|수도]]인 [[평양성]]을 포위하였는데, 이때 오사(烏沙), [[고요묘|요묘]](饒苗)[* 나중에 이 사람의 묘지명이 중국에서 발굴되었다.] 등과 함께 이적과 내통하여 성문을 열어 주었다. 이적은 열린 성문 안으로 군대를 몰고 들어가[* [[삼국사기]]에는 당군이 평양에 입성하기 전에 신라의 [[기병]] 5백을 먼저 ~~화살받이로~~ 성으로 들여보냈다고 한다.] 평양성을 함락시켰으며 고구려는 멸망하고 말았다. [[고구려]]의 숨통을 끊었으니 [[매국노]]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고구려 멸망의 원흉이라고까지 보기는 애매한 게, 이미 북부, 남부 방어선은 대부분 돌파당하고 항복한 상태에 수도 평양성이 한 달 넘게 포위되어 승패가 거의 정해진 상황이었던데다가, 신성 이전에 고구려 왕이었던 [[보장왕]]이 먼저 백기를 들고 성 밖으로 나가 이적에게 ~~GG~~ 항복해 버린 상태였기 때문에 신성이 성문을 열어준 이 시점에서는 신성이 항복을 하든 말든 사실상 고구려는 이미 멸망한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였다. 왕이 항복을 선언하는 등 이미 패배가 확정된 상황에도 불구하고 [[연남건]]이 끝까지 당군에 맞서 [[옥쇄]]하려 하자 이에 불만을 품고 당군과 내통하여 성문을 열어준 것이고, 따지고 보면 신성은 보장왕의 항복하라는 국왕으로서의 마지막 명령을 따른 거라고 해석될 여지도 다분하다. 또한 승려이다보니 당시 [[연개소문]] 가문이 [[도교]] 친화적인 정책을 펼치고 억불정책을 펼쳤기에 불만을 품고 빨랑 연씨 가문과 고구려가 망하길 바라는 마음을 품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.[* 고구려 말기에는 [[도교]]가 [[불교]]보다 더 우대받는 위치에 있었고, [[삼국유사]]에는 도교를 도입해 불교를 견제하는 정책을 추진한 것이 [[연개소문]]이었다고 나오는데, 아예 사찰을 빼앗아 도관으로 내어주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. 당시 고구려 불교계의 고승이었던 [[보덕(승려)|보덕]]이 이러한 연개소문의 도교 진흥정책에 반발하다 남쪽으로 망명했다는 설화까지 있을 정도.] 이후 평양성 함락에 세운 공으로 당으로부터 은청광록대부(銀靑光祿大夫) 벼슬을 받았다고 한다. == 대중매체에서 == [[대조영(드라마)|드라마 대조영]]에서 [[김영기]]가 분했다. 신홍의 형으로 나오며 처음에는 [[연남건]]을 보좌하며 [[연남생]]의 편을 드는 신홍과 대치한다. 그러자 [[부기원]]과 연합해서 연남건이 권력을 잡는 데에 일조한다. 연남생이 몰락하고 당나라로 도주하자 그뒤로는 신홍과 협력하게 되고 대조영 일행들을 제거할 궁리를 하게된다. 나중에는 실제 역사대로 당나라 군대에게 평양성의 성문을 열어주는 [[매국노]]임이 드러나고 결국 평양성이 함락되어 [[고구려]]가 멸망하자 스스로 [[설인귀]] 휘하에 들어가 [[부기원]], [[사부구]]와 같이 [[안동도호부]]의 수뇌부가 된다. 그래서 [[고왕|대조영]]이 이끄는 동명천제단(東明天帝團)의 [[살생부]]에 이름이 올랐으며 이후 요동성의 안동 도호부에서 [[부기원]]의 오른팔로 고구려 유민들을 당나라 노예 상인들에게 사부구와 같이 빼돌리려다가 사부구가 살해당하자 신흥과 함계 계략으로 동명 천제단을 소탕하려 했지만 나중에 역계략을 써서 안동 도호부에 쳐들어 온 대조영에게 잡혀 최후를 맞는다. [[연개소문(드라마)|드라마 연개소문]]에서는 '신승'이라는 이름으로 나오고, 똑같이 고구려 멸망을 주도했던 [[선도해]], [[뇌음신]]과 함께 처단되어 그 수급이 연개소문에게 바쳐진다. [각주] [include(틀:문서 가져옴,title=신성,version=88)] [[분류:생년 미상]][[분류:몰년 미상]][[분류:고구려의 승려]]