[[분류: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]][[분류:한국의 독립운동가]][[분류:동명이인/ㅅ]] [목차] == 중구(서울) 출신 독립운동가, 신석우 == [include(틀:조선일보의 역대 사장)] ||||<table align=right><bgcolor=white><:>[[파일:신석우.jpg|width=300px]] || || 성명 ||신석우(申錫雨) || || 자 / 호 ||헌민(獻民) / 우창(于蒼) || || [[본관]] ||[[고령 신씨]][* 소안공파 24세 우(雨) 항렬.] || || 생몰 ||[[1895년]][* 고령 신씨 대동보에는 1894년생으로 기재되어 있다.] [[9월 2일]] ~ [[1953년]] [[3월 5일]][* 음력 1월 20일.] || || [[출생지]] ||[[한성부]] 남부 훈도방 수표교동[br](현재 [[서울특별시]] [[중구(서울)|중구]] [[수표동]]) || || 사망지 ||[[경상남도]] [[부산광역시]] || || 매장지 ||[[국립대전현충원]] 독립유공자 묘역 || || 추서 ||건국훈장 독립장 || 신석우는 1895년 9월 2일 한성부 남부 훈도방 수표교동(현 서울특별시 중구 수표동)에서 아버지 신태휴(申泰休)와 어머니 [[광산 김씨]] 김태현(金泰鉉)의 딸 사이의 2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. 부친 신태휴는 구한 말 무관 출신으로, 상당한 재산과 토지를 보유한 지주였다. 그는 1915년 3월 [[경기고등학교|경성고등보통학교]] 교원양성소(敎員養成所) 출신 이용우(李用雨) 등이 민족정신 고취와 일본인들에게 침탈당한 사업을 한국인 스스로 부흥시킬 것을 목적으로 조선산직장려계(朝鮮産織奬勵契)를 조직했을 때 계원으로 참여해 민족자본의 육성을 위한 주식 모집 활동을 전개했다. 그러다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1917년 3월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송치되었다가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방면되었다. 이후 [[일본]]으로 유학가서 [[와세다대학]] 전문부를 졸업한 뒤 [[상하이]]로 건너가 [[여운형]]과 함께 고려교민친목회(高麗僑民親睦會)를 조직하고 유인신문(油印新聞)인 <아등(我等)의 소식>을 발간했다. 1919년 4월 상하이에서 개최된 [[임시의정원]] 제1차 회의에 참석하여 임시정부 교통총장(交通總長)으로 선임된 그는 "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흥해보자"며 국호(國號)를 대한민국으로 정할 것을 주장했다. 이에 대해 여운형은 "대한이란 말은 조선 왕조 말엽 잠깐 쓰다가 망한 이름이니 새 국가 이름으로 적합하지 않다"며 반대했지만, 의원 다수가 '대한민국'을 찬성해 결국 대한민국으로 결정되었다. 이후 그는 입법기관의 이름을 대한민국 임시의정원(臨時議政院)으로 결정하는 등 국무원(國務院) 구성과 임시헌장을 제정하여 임시정부 기본법의 기초를 닦았다. 또한 같은 달 개최된 임시의정원 3차 회의에서 경기도 의원, 의원자격심사위원(議員資格審査委員) 등으로 선임되어 민족운동을 위해 진력하였다. 그 뒤 귀국한 그는 1924년 1월 서울에서 [[최린]]·[[김성수(1891)|김성수]]·[[송진우]]·[[안재홍]]·[[조만식]] 등과 함께 연정회(硏政會)를 조직할 것을 계획하였으며, 같은 해 9월에는 부친이 보유하고 있던 토지를 팔아서 마련한 자금8만 5000원으로 [[송병준]]으로부터 [[조선일보]]를 인수하여 상무이사를 역임했고, 뒤이어 [[이상재]]를 사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부사장을 맡았다가 1927년 이상재가 별세하자 제5대 사장에 취임했다. 신석우는 사장으로 취임한 뒤 이상협을 고문으로, 민태원을 편집국장으로 선임했다. 또한 르포르타주식 고발기사를 연재하는 새로운 방식을 채택했다. 1927년 7월부터 ‘창작’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새 연재 ‘국경 순사의 독백’은 국경지역에서 벌어진 일본 경찰의 죄악을 고발하면서 그 포악에 신음하는 한국인의 모습을 묘사했다. 그리고 1928년에는 문자보급운동을 개시하고 1929년 7월 제1회 남녀 학생문자보급반 요원을 공모해, 고향 사람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게 했으며, ‘한글 철자법 강좌’를 연재하고, 한글원본을 4만부 발행하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. 1930년에는 한글원본 9만부, 31년에는 30만부를 배포했고, ‘한글기념가’와 ‘문자보급가’ 현상공모, ‘춘계 문자 보급반’ 강좌 개설 등으로 운동의 활력을 이어갔으며, 소설가 [[심훈]]이 조선일보에서 '상록수'를 연재하도록 했다. 1927년 2월 [[안재홍]]·[[김준연]] 등 30여 명의 민족주의자들과 함께 통일전선의 일환으로 결성된 [[신간회]]에 참여하여 총무간사, 신간회 경성지회(京城支會) 대표로 선임되어 지회 조직 건설에 앞장섰다. 그러나 1931년 5월 신간회가 해소된 뒤 일제 경찰의 감시가 심해지자, 그는 그해 7월 상하이로 탈출했다. 이후 중국에서 조용히 지내던 그는 [[8.15 광복]] 후 귀국했고, 1949년 8월부터 대만의 주 중화민국 대사를 1년 4개월 동안 역임했다. 이후 부산에서 여생을 보내다 1953년 3월 5일에 사망했다.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신석우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. 그리고 2005년 그의 유해를 [[국립대전현충원]]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. [[분류:고령 신씨]][[분류:중구(서울) 출신 인물]][[분류:1895년 출생]][[분류:1953년 사망]][[분류:건국훈장 독립장]][[분류: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]][[분류:와세다대학 출신]] == 의병장, 신석우 == || 성명 ||신석우(申錫雨) || || 생몰 ||? ~ [[1908년]] [[12월 30일]] || || [[출생지]] ||미상 || || 사망지 ||[[전라남도]] [[남원시|남원군]] 북흥면 하조동 || || 추서 ||건국훈장 애국장 || 신석우는 1908년경 [[유종여]] 의병장의 부대에 가담해 전남 남원군 일대에서 활동했다. 그러나 1908년 12월 30일 남원군 북흥면 하조동에서 일본군 광주수비대에 의해 체포된 뒤 피살되었다. 대한민국 정부는 1998년 신석우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. [[분류:조선 의병장]][[분류:생년 미상]][[분류:1908년 사망]][[분류:건국훈장 애국장]]