[[분류:제5대 민의원의원]][[분류:제10대 국회의원]][[분류:제11대 국회의원]][[분류:민주당(1955년) 국회의원]][[분류:유신정우회 국회의원]][[분류:민주정의당 국회의원]][[분류:국가보위입법회의 의원]][[분류:대한민국의 언론인]][[분류:정주시 출신 인물]][[분류:1922년 출생]][[분류:1989년 사망]][[분류:실향민]][[분류:평산 신씨]][[분류:사회과학 교수]][[분류:군인 출신 정치인]][[분류:서울특별시 출신 인물]][[분류:대한민국의 군인]][[분류:육군사관학교 출신]][[분류:노태우 정부/인사]][[분류:제11대 국회의원]][[분류:민주정의당 국회의원]][[분류:공공기관장]][[분류:하나회]][[분류:대한민국의 장관급 인물]] [include(틀:민주정의당 제11대 국회 전국구)] [[파일:external/rokps.or.kr/760.jpg|width=150]] 申相楚 1922년 12월 15일 ~ 1989년 2월 26일 [목차] == 개요 == [[대한민국]]의 전 법학자, 언론인, [[정치인]]이며 본관은 [[평산 신씨|평산]](平山)[* 35세손 동(東) '''상(相)''' 영(榮) 주(柱) 항렬], 호는 월강(月崗)이다. 종교는 가톨릭이며 세례명은 요한이다. == 활동 내역 == 1922년 [[평안북도]] [[정주시|정주군]]에서 태어났다. 신의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. 이후 [[일본]] [[후쿠오카]]고등학교 문과를 졸업한 뒤, [[도쿄|도쿄제국대학]] 법학부에 입학하였다. 그러나 1944년 일본 [[학병]]으로 중국전선에 배치되었다. 팔로군지구로 탈출하여 [[조선의용대]]의 일원으로 항일 독립전쟁에 참가하다가 [[8.15 광복]]을 맞이하였다. 1946년 초 고향으로 귀환하였다가 [[북한]] 공산당에 의해 체포되어 강제노역의 감옥생활을 하였다. 1949년 초 [[월남]]하였고 이후 [[반공]]주의자가 되었다. 이후 일선 대학교에서 법학 [[교수]]를 역임하였다. 한편 [[동아일보]] 논설위원을 역임하고 사상계 편집에 참여하면서 [[이승만]] 정권의 독재를 비판하였다. 1961년 2월 [[김상돈]]이 [[서울특별시장]] 선거 출마를 위해 [[국회의원]]직을 사퇴함으로써 치러진 [[재보궐선거]]에서 [[민주당(1955년)|민주당]] 후보로 [[서울특별시]] [[마포구]]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. 1963년 [[제6대 국회의원 선거]]에서 민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[[종로구]]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[[민정당]] [[전진한]]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. 이후 일선 대학교 교수로 돌아간 한편 [[중앙일보]] 논설위원을 역임하였다. 그러나 1966년 [[동양방송]]에 출연해서 [[삼성그룹]]의 [[사카린 밀수 사건]]을 옹호하다가 물의를 빚었다. 그러다가 [[10월 유신]] 이후 친여 인사로 변했다. 1976년부터 1980년까지 제2기 및 제3기 [[유신정우회]] [[대한민국 국회의원|국회의원]]을 역임하였다. 1980년 [[전두환]] 정권이 출범할 무렵 국가보위입법회의 입법위원을 역임하였다. 그리고 1981년 [[제11대 국회의원 선거]]에서 [[민주정의당]] [[전국구]]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. 그 외에 1954년부터 흥사단 활동을 평생동안 하며 1984~1988년까지 북한학회 회장, 1985년 [[한국반공연맹]] 이사장을 잠시 맡았으며, 1989년 2월 26일 오후, 서울 서초구 삼호가든아파트 B동 601호에서 숙환으로 세상을 떠났다.