||<-2><tablealign=right><tablebgcolor=#fff><table width=450><tablebordercolor=#0047a0> 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; padding: 5px 10px; background-image: linear-gradient(115deg, #cd313a 50%, #0047a0 50%)" '''[[독립유공자|{{{#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}}}]]'''[br] {{{#FFFFFF '''{{{+1 신백우}}}[br]申伯雨'''}}}}}} || ||<-2> 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신백우.jpg|width=100%]]}}} || ||<|2><width=100><colbgcolor=#0047a0><colcolor=#ffffff> '''출생''' ||[[1889년]][* 고령 신씨 대동보에는 1886년생으로 기재되어 있다.] [[12월 28일]] || ||[[충청도]] 청주목 산내이상면 관정리[br](現 [[충청북도]] [[청주시]] [[상당구]] [[낭성면]] 관정리)[* 인근의 귀래리·추정리·호정리와 함께 [[고령 신씨]] 집성촌이다. 친일반민족행위자 [[신흥우]]도 이 마을 출신이다.] || ||<|2> '''사망''' ||[[1962년]] [[1월 2일]][* 고령 신씨 대동보에는 1월 24일 별세했다고 기재되어 있다.] || ||[[충청북도]] [[청원군]][br](現 [[충청북도]] 청주시 청원구) || || '''묘소''' ||[[국립대전현충원]] 독립유공자 묘역 || || '''본관''' ||[[고령 신씨]][* 영성군파 24세 우(雨) 항렬.] || || '''자''' ||윤장(閏長) || || '''호''' ||경부(畊夫) || || '''부모''' ||아버지 신병휴, 어머니 송기주의 딸 || || '''형제자매''' ||2남 1녀중 장남 || || '''자녀''' ||아들 [[신범식]] || || '''학력''' ||[[보성전문학교]] {{{-2 (법학 / 수료)}}}[br]관립한성외국어학교 {{{-2 (일어과)}}}[* 졸업 여부는 불명][br][[신흥무관학교]] {{{-2 (졸업)}}} || || '''상훈''' ||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|| [목차] [clearfix] == 개요 == 한국의 [[독립운동가]].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. == 생애 == === 생애 초년기 === 1889년 12월 28일 충청도 청주목 산내이상면 관정리(현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관정리)에서 아버지 신병휴(申秉休)와 어머니 [[여산 송씨]] 송기주(宋基周)의 딸 사이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. 그는 서당에서 족친인 [[신채호]]와 함께 한문을 익혔고, 서울의 측량학교·외국어학교 및 [[보성전문학교]] 법학과 야간부를 1년 수료하였다. 이후 청주 탑동측량학교 교사를 지냈으며, 1909년 관립 한성외국어학교 속성과에 입학하여 일본어를 배웠다. 1909년 [[신민회]]의 외곽 청년단체인 청년학우회(靑年學友會)가 설립되자 이에 가입하여 청년학우회 한성연회(漢城聯會)의 서기(書記)로서 활동하였다. 또한 1909년의 신민회 계열의 비합법적 청년단체로서 대동청년당(大東靑年黨)이 조직되자, [[남형우]], [[안희제]], [[박중화]] 등 80여명과 함께 국권회복을 위한 지하활동을 하였다. === 일제강점기 === 1911년 만주로 망명한 그는 [[단둥시|안동현]]에 독립운동 연락기관으로 성신태(誠信泰) 상점을 설립했고, 봉천성 일대에서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고자 노력했다. 그러다 1918년 조부가 별세하자 귀국하였고, 1919년 [[3.1 운동]] 직후 4월에 국민대회를 개최하고 한성 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했다. 그 후 일제 경찰의 추적을 피해 상하이로 망명한 그는 [[대한민국 임시정부]] 수립에 참여했지만, [[이승만]]이 대통령에 취임하게 되자 [[신채호]]와 함께 이를 반대했지만 끝내 막지 못하자 만주로 이동했다. 이후 [[신흥무관학교]]에서 군사교육을 받고 서로군정서(西路軍政署)의 참모부에서 활동하다가 1921년에 귀국했고, 그해 9월 서울청년회 이사가 된 뒤 1922년 1월 무산자동지회 결성에 참여하고 간부가 되었다. 3월 잡지 <신생활>에 '사회운동(社會運動)의 선구자(先驅者)의 출래(出來)를 촉(促)하노라' 등을 게재했다. 10월 조선노동공제회 해체를 주장하며 조선노동연맹회 결성을 주도했다. 같은 해 서울에서 공산주의단체 결성에 참여하고 위원이 되었다. 1923년 봄 조선공산당 중앙총국 국내부 위원이 되었으며, 7월 사회주의 사상단체 신사상연구회에 가입했다. 그러나 8월에 국내 각 공산주의그룹의 내분에 휘말렸고, 낙양관에서 상대 정파에게 폭행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. 1924년 봄 각파 공산주의자그룹의 통일을 위해 개최된 ‘13인회(十三人會)’에 참가했으며, 4월 경성농민회 대표로서 조선노농총동맹 창립대회에 참석하여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. 5월 고려공산당 창립대회준비위원회 국내 대표로 선정되었으나 참가하지 않았다. 1923년 9월 [[조선일보]] 고문 겸 논설위원이 되었으나 10월 공산주의단체를 조직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가 1925년 5월 [[서대문형무소]]에서 병보석으로 출옥한 후 귀향했다. 이후 공산주의와 연을 끊은 그는 농촌운동과 고령신씨 문중 사업에 힘을 기울였다. 1936년 신채호가 [[여순감옥]]에서 옥사하여 그 유해가 돌아오자, 이를 고향에 안장하고 묘비를 세웠다. === 광복 이후 ~ 말년 === [[8.15 광복]] 후, 1946년 민주주의독립전선 결성에 참여하고 최고위원이 되었다. 또한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중앙위원회 조직부장을 비롯해 [[대한독립촉성국민회]] 등을 통한 정치 활동을 전개했다. 1950년 [[제2대 국회의원 선거]]에 [[국민회]] 후보로 충청북도 제2선거구인 청원군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[[이도영(1913)|이도영]]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. 이후에는 정치와 연을 끊고 [[대종교]]에 입교해 포교 활동에 전력을 기울여 1955년에 원로원 참의에 선임되었다. 또한 1956년 [[문일민]], [[김승학]], 운허 스님과 함께 <한국독립운동사>를 발간했다. 1962년 1월 2일 청원군에서 병사했다. === 사후 ===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신백우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. 그리고 1994년 그의 유해를 [[국립대전현충원]]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. == 여담 == [[신범식]] 전 문화공보부장관이 그의 아들이다. [각주] [[분류:한국의 사회주의 독립운동가]][[분류:대종교 신자]][[분류:고령 신씨]][[분류:상당구 출신 인물]][[분류:1889년 출생]][[분류:1962년 사망]][[분류:고려대학교 출신/전신 학교]][[분류:경희대학교 출신/전신 학교]][[분류:건국훈장 애족장]][[분류: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]][[분류: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]]