[include(틀:인도의 역사)] [include(틀:티베트의 역사)] [[분류:19세기 멸망]] ||||||<tablealign=right><:> {{{+3 '''시크 제국'''[br] '''امپراطوری سیک [br]ਸਿੱਖ ਖਾਲਸਾ ਰਾਜ'''}}}[br]''Sarkar-i Khalsa'' || ||||||<:> [[파일:external/upload.wikimedia.org/177px-Sikh_Empire_tri-lingual.jpg]] || ||<-3><:> 1799년 ~ 1849년 || ||<:> [[위치]] ||||[[펀자브]], [[카슈미르]] || ||<:> [[수도(행정구역)|수도]] ||||[[라호르]] || ||<:> 정치체제 ||||군주제 || ||<:> 국가원수 ||||[[마하라자]] || ||<:> 주요 군주 ||||란지트 싱(1801~1839) || ||<:> [[언어]] ||||[[페르시아어]], [[펀자브어]] || ||<:> [[종교]] ||||[[시크교]] || ||<:> 민족 ||||[[펀자브인]] || ||<:> 성립 이전 ||||시크 연방[br][[두라니 왕조]][br][[마라타 제국]] || ||<:> 멸망 이후 ||||[[영국 동인도 회사]] || [목차] == 개요 == [[이슬람]]과 [[힌두교]]를 접목시킨 [[시크교]]는 당시 수백여년간 이어지던 [[펀자브]] 지역을 포함한 북인도 지역의 피지배층이 내놓은 절충안이었다. 이슬람의 평등 사상과 힌두교의 윤회 사상 등이 합쳐진 시크교는 [[악바르]] 대제 시기와 자한기르, 샤 자한으로 이어지는 무굴 제국의 전성기 내내 존중받아 무굴 제국에 헌신했다. 그러나 이슬람 제일주의를 앞세운 독실한 무슬림 --광신도-- [[아우랑제브]]는 시크교, 힌두교를 포함한 종교들에게 가혹한 탄압을 행하였고, 그에 대한 반발은 거세었다. 특히 [[지즈야]] (종교 인두세)의 부활과 무리한 남인도원정으로 인한 재정 악화로 지즈야를 인상한 사건은 그 분노를 가중시켰다. 그 결과, 18세기 초, 아우랑제브의 사망 직전부터 무굴제국의 분열은 명약관화해 보였고, 1707년 그가 사망하자 북부의 시크 교도들과 남부의 힌두교도들은 억눌려 왔던 분노를 폭발시켰다. 18세기 내내 힌두교도의 [[마라타 동맹]]과 시크교도의 세력은 양면에서 무굴제국을 위협하며 그 해체를 가속화시켰다.[* 다만 시크교도 세력은 주로 인도 내부로 확장하기보다는 근거지 펀자브를 위협하는 세력과 전쟁을 벌였다. 18세기 중반이면 무굴 제국이 이미 완전히 유명무실해져 마라타의 보호국 처지가 되고, 시크교도는 주로 아프간족의 [[두라니 제국]] 등과 대립하게 된다. 사실 시크교도 세력은 1715년의 무굴과의 패배한 전쟁 이후에는, 마라타와 달리 세력이 부족해 무굴과 직접 군사적으로 대립하지는 않고 게릴라전으로 일관한다.] == 역사 == 이전부터 [[무굴 제국]]은 [[이슬람]] 제국임을 내세웠지만, 타종교들에 대해서는 매우 관용적인 태도를 보여 왔다. 하지만 17세기 중반 극단주의 [[무슬림]] ~~광신자~~ [[아우랑제브]]가 즉위하면서 이러한 관용정책들이 탄압정책으로 뒤바뀌면서 문제가 발생한다. 당시 인도 서북부 지역은 [[펀자브]]를 중심으로 [[힌두교]]와 [[이슬람]]을 접합시킨 새로운 종교 [[시크교]]가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. 역시나 [[아우랑제브]]는 이러한 이교도들의 행태를 ~~눈꼴 시러웠는지~~ 지켜보지만 않았고 계속해서 탄압해온다. 결국 1675년에 [[아우랑제브]]는 [[시크교]]의 [[구루]][* 인도계 종교들의 선지자를 뜻한다.] 테그 바하두르를 처형시키는데[* [[테그 바하두르]]가 처형된 사연은 이렇다. [[시크교|시크교도]]들이 많은 [[펀자브]] 지역 근방에 [[힌두교|힌두교도]]들이 많이 살았고, 교리상 타 종교에 관용적인 태도를 고수하도록 하는 시크교의 특성 덕택에 힌두교인들과 시크교인들은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었다. 문제는 [[이슬람 근본주의|이슬람 근본주의자]]였던 [[아우랑제브]]가 이곳의 [[힌두교|힌두교인]]들에게 [[이슬람교]]로 개종할 것을 강요하자, 힌두교인들은 이 문제를 상의하고자, [[테그 바하두르]]에게 조언을 구하고자 했다. 그러자 테그 바하두르는 직접 [[아우랑제브]]를 만나서 [[힌두교]] 신자들에 대한 강제적인 개종을 중단하라고 요구했는데, 이 말을 가소롭게 여긴 아우랑제브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테그 바하두르를 처형하라고 했다. 이로써 [[시크교]] 신자들은 [[테그 바하두르]]를 일개 종교의 지도자로서 타 종교를 위해 목숨을 바친 전무후무한 인물이라고 추앙해 마지않았고, 얼마 뒤에 [[힌두교]] 신자들과 연합해서 [[무굴 제국]]에 반기를 들었다.] 이것이 시크교도들의 반란에 크나큰 발단이 된다. 결국 시크교도들은 후대 구루 고빈드 싱 시기부터 평범한 종교 집단에서 군사적 조직으로 변화하기 시작한다. 구루 고빈드 싱은 새로운 계율 체계를 시크교에 도입하였는데, 여기에는 할랄 고기를 먹는 대신 단 칼에 목을 베어 도축한 고기를 먹고 체계적인 군사 훈련을 시행하며 항상 키르판이라는 칼을 소지하고 다닐 것을 포함하는 계율이 포함되어 있었다. 고빈드 싱이 지휘하는 시크교도들은 [[펀자브]] 및 [[카슈미르]]에서 힌두교도들의 지원을 받아 17세기 후반 무굴 제국 군대를 상대로 네 차례의 승리를 거두었다. [[아우랑제브]]와는 성향이 매우 다른 아들 [[바하두르 샤 1세]][* 바하두르 샤 1세는 아버지였던 [[아우랑제브]]와는 정반대로 이전 황제들과 같은 관용정책의 노선을 걷는다. 하지만 노환 때문에 재위 5년만에 세상을 뜬다.]가 이들을 무찌르면서 다시금 [[무굴 제국]]에게 굴복하고 만다. 바하두르 샤 1세는 전체적인 능력치가 상당히 뛰어난 황제였고, 관용정책을 베풀었기에 [[시크교|시크교도]]들은 이 시기에는 조용히 지낸다. 하지만 바하두르 샤가 사망한 뒤 [[무굴 제국]]이 다시금 혼란에 빠지면서 18세기 후반 그들은 란지트 싱을 중심으로 자신들만의 군대 달 칼사[* 세례(암리트 산차르)받은 시크교도는 "싱(남, 사자)/카우르(여, 공주)"의 이름을 받고 "칼사(또는 할사)"라는 시크 공동체에 속하게 된다. 이는 원래 "순결한 자"라는 의미의 펀자브어 단어로, 구루 [[고빈드 싱]]이 모든 세례받은 시크교도에게 준 이름이다. 칼사는 원래 어느 정도 군사적인 성격이 있는데, 칼사에 속한 자의 의무 중 하나는 약자와 억압받는 이를 지키기 위해 무기와 승마를 숙련하는 것이다. 달 칼사는 "칼사 군대"라는 뜻으로, 단순히 정치적인 성격의 시크교도 모임부터 진짜 군대까지 다양한 용법으로 쓰이는 단어이다. 그러나 단순히 배경설명 없이 "달 칼사"라고 하면 18세기 중반 활동한 시크교도 세력의 자원군(1747-1780)을 지칭하는 것으로, 펀자브에서 시크교도가 [[두라니 왕조]]와 86년에 걸쳐 벌인 전쟁(1751-1837)에서 초기(1751-1765) 시크교도의 주력군이었다.]라는 것을 조직하여 제국으로부터 저항하기 시작한다(1799). 결국 그들은 독립에 성공하게 되고 1801년에는 스스로 [[대왕]][* 이들의 언어로 마하라자]을 칭하고 시크 왕국을 개편해 나간다. 이후 란지트 싱은 나폴레옹 전쟁 당시의 베테랑 출신 프랑스 장교들을 군사 교관으로 영입해 서구식 군대를 조직하는데 힘을 기울였고, 이 결과 서구식 친위대가 5,500명, 그 외 서구식 정규군이 약 60,000명에 이르렀다.[* 서구식 훈련을 거부한 전통 방식의 정규군 역시 약 50,000명에 달해 총병력은 약 12만 명 가까이 되었다.] 이 당시 수틀레지 강을 경계로 동인도 회사와 국경의 합의가 이루어졌기에, 인도 본토로의 진출이 저지된 대신 아프간, 카슈미르 방면으로 활발한 영토 확장을 추진했다. 이 와중에 청과 충돌하여 시킴 일대의 영토를 점령하였고, 네팔 구르카족과도 전쟁을 치르기도 했다. 란지트 싱이 왕국을 다스릴 때는 큰 문제가 없었으나, 그가 사망한 뒤 무능한 후계자 카라크 싱이 뒤를 이으면서 시크 왕국은 정치적 혼란 상태에 빠지게 된다. 이때 당시 [[대영제국|영국]]이 신드 지방을 막 합병하고 [[펀자브]]에 눈길을 돌린 매우 위험한 상태였다. 1845년 이러한 영국의 야욕을 막고자 먼저 선제공격을 가했으나, 당시 시크 왕국 군대 자체의 내부 분열도 상당했었기에 제대로 된 공격을 할 수가 없었다. 결국 소브라온 전투(Battle of Sobraon)에서 패배하여 [[라호르]] 조약이라는 불평등 평화협정을 맺게 된다. 이 조약으로 [[카슈미르]] 지방을 아예 영국한테 뺏기고 말았으며, 정치적으로도 영국의 반속국이나 다를바 없는 상태가 된다. 이에 1848년 시크교도들은 다시 힘을 모아 영국에게 대항한다. 하지만 이 두 번째 [[영국-시크 전쟁]]에서도 내부 분열이 발생하였고 ~~이전의 전쟁에서 교훈을 못 얻은 듯.~~ 영국군은 역시나 막강했기에 패배하고 만다. 결국 영국은 시크 왕국의 마지막 왕 두레프 싱을 폐위시키고 이 지역을 직접 통치로 전환하니 그대로 멸망하게 된다. [[파일:5D046CFF-1810-4FB7-9DC7-F4594CBE0CE1.jpg]] [[파일:587FD799-4C40-4924-9A93-5A7FE0C746CC.jpg]] [[분류:아시아의 왕국]][[분류:인도의 역사]]