[[분류:일본 제국의 군인]][[분류:제2차 세계 대전/군인]][[분류:도쿄도 출신 인물]][[분류:1914년 출생]][[분류:2005년 사망]][[분류:일본의 정치인]][[분류:일본 공산당 출신]][[분류:일본 공산당 국회의원]][[분류:하기시 출신 인물]][[분류:1901년 출생]][[분류:1989년 사망]][[분류:제명된 정치인]] [목차] == [[일본]]의 [[전투조종사]], 비행대 [[지휘관]] == 志賀淑雄, 1914, 도쿄시~2005. 11. 25. 제2차 세계 대전 태평양 전선 당시의 [[일본 해군]] [[파일럿]]이자 비행대 [[지휘관]]이다. 파일럿으로서는 활약상이 크게 알려져있지 않은 비교적 [[마이너]]한 인물이지만, 종전 당시 [[미군]] 사이에서 가장 유명했던 [[일본]]의 파일럿이었으며 특히 당시 동료 파일럿들의 증언상으로는 지휘관으로서 대단히 존경받는 인물이었던 듯하다. [[겐다 미노루]]와 사이가 돈독했던지라 겐다 미노루 옹호론자들이 내세우는 주장중에 '그 시가 요시오가 믿고 따랐던 사령관이다'라는 것이 있을 정도이다. 자신의 격추수를 묻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 '단독격추수는 6기입니다. 그리고 협력격추수는 그보다 더 많습니다. 어느 정도 공격해놓고나서 아직 격추기록이 없는 신참들에게 격추시키게 하거든요'라고. 그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단적으로 알 수 있는 대답. 실제로도 '[[일본 해군]]에는 [[에이스]] 파일럿이라는 칭호가 없다. 모두 공동전과로 치는 것이 전통이다.'라며 특정 파일럿이 영웅시되는 풍조를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한다. 적어도 공식석상에서 그를 [[비판]]한 것은 그와 완전히 반대노선의 인물이자 잠시나마 그의 직속부하였던 [[사카이 사부로]]가 유일하다. 이유는 '[[지휘관]]으로서는 너무 물러터졌다'라고 한다. 반면 시가 요시오는 사카이 사부로가 자신의 부하로 있었을 당시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까 항상 노심초사하며 다녔다는 모양이다. 파일럿로서의 가장 큰 전과는 [[준요]]의 비행대장으로 [[산타크루즈 해전]]에서 공격대를 이끌고 [[엔터프라이즈]]에 손상을 입히고 [[호넷]]을 격침에 이르게 한 일이다. 이후 [[과달카날 전투]]가 벌어지기 직전 그의 안부를 걱정한 동기가 그를 신형 기체 개발의 [[테스트 파일럿]]으로 추천하고 이것이 승인되면서 [[시덴]]과 [[렛푸]]의 기체개발에 참가하게 된다. 기체개발이 끝나고서 시덴을 주력[[함재기]]로 한 [[시나노]]의 비행대장으로 임명되지만, 시나노가 완성전 격침되면서 무산. 이후 [[343 해군항공대]]의 비행대장으로 임명되며 파일럿으로보다는 지휘관의 길을 걷게 된다. 시가 자신은 직접 출격하여 [[부하]]들과 함께 싸우길 원했으나, 부하와 [[상관]], [[동료]]들의 설득으로 지휘와 지원에 전념하기로 결정했다는 모양. 한마디로 그의 모든 주변인들이 그가 전장에 나가 죽길 원하지 않았다는 소리다. 하지만 그보다도 더 부각되는 일화는 [[343 해군항공대]]에 비행대장으로 있었을 당시 상부에서 떨어진 [[카미카제]] 명령을 거부한 에피소드다. [[사령부]]로부터 카미카제 [[명령]]을 받은 343 항공대의 [[사령관]] [[겐다 미노루]]가 시가에게 이 소식을 전하자 "제가 선두로 출격하죠. 병학교 출신자도 전부 출격시키겠습니다. 예비사관은 출격시켜선 안되겠죠. 겐다 사령관님은 마지막에 와주십시오. 다만 조건이 있습니다. '''명령을 내린 사령부의 [[참모]]가 저와 함께 선두에서 출격한다면 343 항공대는 하겠습니다'''"라고 대답. 이 말을 들은 겐다 미노루는 '당연한 소리다'라고 맞장구[* [[겐다 미노루]]도 [[카미카제]] 반대론자 중 한명이었다. 사후 [[사카이 사부로]]에겐 '[[부하]]들을 자살공격으로 내몰았던 [[용서]]할 수 없는 [[인간]]이다'라고 까였지만. 참고로 겐다는 사카이 사부로의 앙숙이었던 [[칸노 나오시]]를 적극적으로 밀어주던 인물이었던지라 사카이 사부로에게 [[원한]]을 사고 있었다. 수차레에 걸친 칸노 나오시의 카미카제 지원을 전부 퇴짜놓은 것도 직속상관이었던 겐다 미노루. 여기에 사카이 사부로가 극도로 혐오하던 기체인 [[시덴]]을 항공대의 주력기로 결정한 것도 사카이 사부로가 그를 싫어하던 이유 중 하나였다.]. 그리고 겐다 미노루가 이 말을 사령부에 전하자 이후 단 한번도 343 항공대에 카미카제 명령은 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(…). 완강한 거부는 아니지만 [[군인]]으로서의 [[패기]]와 사령관에 대한 예우와 [[부하]]들을 생각하는 마음씀씀이가 모두 묻어나는 격식있는 거부라는 평. 이후로도 "[[자폭]]공격에는 절대로 반대다", "지휘관으로서 해서는 안될 일이다", "'너희들 죽으러 가라면서 자기들은 죽지 않겠다는 것은 명령의 영역이 아니다"라는 등 카미카제에 대해 대단히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. 이후 [[일본]]이 [[항복]]을 선언하고 [[상관]]들이 모두 중앙[[사령부]]로 소집되자 비행대에서 남아있는 [[부하]]들을 이끌고 마지막 단체 연습비행을 행한 뒤 공식적인 [[군인]]으로서의 활동을 종료. 이후 [[겐다 미노루]]의 추천을 받아 '''황실 경호작전'''[* [[미국]]이 [[천황]을를 끌어내리고 [[일본/황실|일본 황실]]의 씨를 말려버릴 것을 대비해서 [[일반인]]으로 위장하여 몰래 황가를 지키는 작전이었다. 이후 [[더글러스 맥아더]]가 황실을 유지시키기로 결정함에 따라 자연스레 작전종료.]에 참가. 이후 [[쇼와 덴노]]의 장례에도 구 [[일본 해군]] 대표 중 한명으로 참석. 구 일본 해군 파일럿들의 모임인 '[[제로센]] 탑승원회'의 회장으로 지내기도 했다. 전후 많은 [[동료]]들이 [[자위대]]로 복귀하는 가운데 그는 [[경찰]]에게 [[방탄복]]이나 [[곤봉]] 등을 납품하는 [[공장]]을 경영하며 생활한다. 그에게 어째서 복귀하지 않느냐고 묻자 '수많은 [[부하]]들을 전사시킨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[[명복]]을 비는 것과 살아남은 [[전우]]들의 뒷바라지를 하는 것입니다. 전투중 적기에게 꼬리를 잡혀서 드디어 죽는건가 싶었을 때 부하가 사이에 끼어들어 대신 맞아주고는 불에 타오르며 제게 [[경례]]를 하곤 떨어져갔습니다. 그 모습이 잊혀지질 않아요.'라고 대답. == [[일본]]의 [[정치가]], [[공산주의자]] == 志賀義雄. 1901. 1. 12. ~ 1989. 3. 6. [[야마구치]] 현 하기 시 출생으로, [[도쿄제국대학]] 시절 학생운동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[[일본공산당]]에 입당한다. 이후 [[치안유지법]]으로 투옥되나 전향을 거부하고 전후까지 옥살이를 하며, [[1945년]] [[GHQ]]의 지령으로 겨우 풀려날 수 있었다. 전후 토쿠다 큐이치, 노사카 산조 등과 함께 [[일본공산당]]의 재건을 주도하였고, [[중의원 의원 총선거]]에 당선되면서 일본공산당이 배출한 최초의 [[중의원]]이 되었다. 이후 레드 퍼지로 중의원직을 상실하며, 일본공산당이 무장투쟁론을 포기한 후 다시 중의원직에 복직하나 부분적 핵확산 금지조약에 따른 당론의 차이로 일본공산당에서 제명된다. 이후 함께 제명된 의원들과 '일본의 소리'를 조직하여 활동하나 큰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였다. [[1989년]] [[사망]]하였다.