[[분류: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]][[분류:한국의 독립운동가]][[분류:야성 송씨]][[분류:성주군 출신 인물]][[분류:1884년 출생]][[분류:1961년 사망]][[분류:건국훈장 애족장]] || 성명 ||<(> 송훈익(宋勳翼) || || 본관 ||<(> [[송(성씨)|야성 송씨]] || || 생몰 ||<(> [[1884년]] [[9월 22일]] ~ [[1961년]] [[2월 27일]] || || [[출생지]] ||<(> 경상도 성주목[br](현 [[경상북도]] [[성주군]] 초전면 고산리)[* [[송(성씨)|야성 송씨]] 집성촌이다. 독립유공자 [[송규선]]·[[송문근]]·[[송수근(독립운동가)|송수근]]·[[송우선]]·[[송인집]]·[[송준필(독립운동가)|송준필]]·[[송천흠]]·[[송회근]]도 이 마을 출신이다.] || || 추서 ||<(> 건국훈장 애족장 || [목차] == 개요 == 한국의 [[독립운동가]].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. == 생애 == 송훈익은 1884년 9월 22일 경상도 성주목(현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고산리)에서 태어났다. 1919년 [[경성부]]에서 일어난 [[3.1 운동]]에 이어 민족의 독립을 요구하는 함성이 전국적으로 퍼져 각지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나자 성주군의 유림들도 움직이기 시작하였다. 이미 3월 28일 성주면 장날에 선남면에 사는 이현호(李玄琥) 등이 독립만세를 부른 일이 있으나 큰 운동으로 확대되지는 못하였고 4월 2일 유림측과 기독교측이 연합전선을 펴 봉기함에 따라 비로소 본격적인 만세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. 이때 월항면의 유생 이기정(李基定)은 전국 각지의 독립운동 봉기상황을 알게 되어 같은 유생이자 동지인 송인집(宋寅輯)과 더불어 성주군내 양반을 규합하여 독립운동을 일으키기로 약속하였다. 이들은 그후 야성 송씨 문중에서 유력한 수 명을 불러내어 운동을 협의한 후 성주면 장날에 거사를 일으킬 것을 계획하고 군내 유림에게 연락하여 규합체를 형성하는 등 의거준비를 하였다. 그는 1919년 4월 2일 성주면 장날 모여든 700∼800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쳤으나 일본 경찰의 발포로 계속적인 만세시위가 어려워지자, 산 위로 올라가 봉화를 올리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를 전개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. 그리하여 5월 20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개월형을 언도받고[[http://theme.archives.go.kr/next/indy/viewIndyDetail.do?archiveId=0001352201&evntId=0034988618&evntdowngbn=Y&indpnId=0000019841&actionType=det&flag=1&search_region=|#]] 공소하였으나 8월 2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공소 기각되어[[http://theme.archives.go.kr/next/indy/viewIndyDetail.do?archiveId=0001351677&evntId=0034983783&evntdowngbn=Y&indpnId=0000015337&actionType=det&flag=1&search_region=|#]] 미결 기간을 합하여 총 11개월 18일간의 옥고를 치렀다. 출옥 후 조용히 지내다가 1961년 2월 27일 별세하였다. 199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.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.