* (동음이의어) [[남조]] 11대왕 소성왕 [[권풍우]] [include(틀:역대 신라 국왕)] ||<tablealign=center><:><#4A2D5B><table bordercolor=white>'''{{{#FFD700 시호}}}'''||<-2><(><white> '''소성왕(昭聖王) / 소성왕(昭成王)''' || ||<:><#4A2D5B>'''{{{#FFD700 관등}}}'''||<-2><(><white> 대아찬(大阿飡)[br]파진찬(波珍飡) || ||<:><#4A2D5B>'''{{{#FFD700 직위}}}'''||<-2><(><white> 시중(侍中)[br]병부령(兵部令) || ||<:><#4A2D5B>'''{{{#FFD700 성씨}}}'''||<-2><(><white> 김(金) || ||<:><#4A2D5B>'''{{{#FFD700 휘}}}'''||<-2><(><white> 준옹(俊邕) || ||<:><#4A2D5B>'''{{{#FFD700 왕후}}}'''||<-2><(><white> 계화부인(桂花夫人) 김씨 || ||<:><#4A2D5B>'''{{{#FFD700 왕태자}}}'''||<-2><(><white> [[애장왕|김청명]](金淸明) || ||<:><#4A2D5B>'''{{{#FFD700 왕자}}}'''||<-2><(><white> 김체명(金體明)[* [[신당서]]에 나오는 [[애장왕]]의 아우 소금첨명(蘇金添明)과 동일인으로 생각된다. [[중고한어]]에서 體明의 발음은 thëi miäng이고, 添明의 발음은 thëm miäng이기 때문. 蘇는 쇠의 음차로 金와 동의어이다.] || ||<:><#4A2D5B>'''{{{#FFD700 왕녀}}}'''||<-2><(><white> 장화부인(章和夫人) || ||<:><#4A2D5B>'''{{{#FFD700 부왕}}}'''||<-2><(><white> [[인겸|혜충대왕]](惠忠大王) 김인겸(金仁謙) || ||<:><#4A2D5B>'''{{{#FFD700 모후}}}'''||<-2><(><white> 성목태후(聖穆太后) 김씨 || ||<:><#4A2D5B>'''{{{#FFD700 생몰연도}}}'''||<white><:> 음력||<white>? ~ [[800년]] || ||<:><#4A2D5B>'''{{{#FFD700 재위기간}}}'''||<white><:> 음력||<white>[[799년]] 1월 ~ [[800년]] 6월 (1년 5개월) || [목차] == 개요 == [[신라]]의 제39대 [[국왕]]. [[원성왕]]의 손자로 본래 [[태자]]였던 [[김인겸]]의 아들이다. 김인겸이 아버지보다 [[단명]]하는 바람에 원성왕에 이어 [[왕위]]에 대신 오르게 되었다. 왕비는 김숙명의 딸로 계화부인(桂花夫人) 또는 계화왕후[* 이후 대왕후(大王后)로 추존.]라고 불린다. [[애장왕]]과 [[흥덕왕]]의 왕비 장화부인(章和夫人)[* 시호는 정목왕후(定穆王后).]의 아버지. == 생애 == 왕위에 오르기 전에는 789년 [[대아찬]]의 직책을 받아 [[당나라]]에 사신으로 갔다왔다. 791년 1월 아버지 김인겸이 죽었고 791년 10월 [[시중]]에 임명되었으나 792년 8월 병으로 사직하였다. 이 때부터 몸이 [[건강]]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아버지가 죽은 직후이니 상을 치르기 위해서일 수도 있을 것이다. 소성왕은 태자로 책봉되기 이전부터 중앙 [[정치]]에서 상당한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점은 신라 중대와는 비교되는 점이다. 791년 김인겸이 죽은 후 태자 자리는 원성왕의 둘째 아들이자 소성왕의 [[숙부]]가 되는 의영(義英)에게 넘어갔지만 의영 역시 794년 2월 죽어서 결국 795년 태자로 책봉되었다. 799년 원성왕이 승하한 이후에 즉위하지만 소성왕 역시 즉위 1년만에 [[요절]]한다. 어린 아들이 있던 것으로 봐서 최소한 20대 이상의 나이는 먹은 듯 싶지만 오래 살지는 못한 듯하다. 동생 흥덕왕이 777년생이고 소성왕과 흥덕왕 중간에 아랫동생 [[헌덕왕]]이 있는 것으로 보아 최소한 760년대 후반~770년대 전반에 출생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. 일찍 죽는 바람에 웃지 못할 일도 벌어졌는데 원성왕이 죽고 소성왕이 즉위했다는 소식을 들은 당나라 [[조정]]은 [[위단]]이라는 인물을 사신으로 보내 원성왕 조문 겸 소성왕 책봉 사절로 신라에 파견했다. 그런데 위단 일행이 당나라 수도 [[장안]]을 떠나 [[운주]]에 이르자 소성왕이 죽고 애장왕이 즉위했다는 소식이 이들에게 들어갔다. 헛걸음을 하게 된 위단 일행은 장안으로 돌아갔다. == 주요 치적 == 재위 기간이 짧지만 소성왕은 [[국학]]의 학생들에게 거로현(오늘날의 [[경상남도]] [[진주시]] 지역)을 [[녹읍]]으로 하사한다. 국학 학생들에게 경제적 지원을 해 준 셈으로 오늘날로 치면 국학 학생들에게 [[국가장학금]]을 수여한 것인데 원성왕 대에 유명무실해진 국학을 진흥하기 위한 조치로 볼 수 있다. 이런 조치에도 국학 대신 당나라나 [[해외]]로 [[유학]]가는 학생들이 많아져서 이후에 [[도로아미타불]]이 되었다. 소성왕 때는 특이한 [[생물]]을 발견한 기사도 있는데 한 번은 9척이나 되는 [[인삼]]이 발견되었다. 당시의 1척은 오늘날의 1척보다 짧지만 그걸 감안해도 엄청 큰 인삼인 것은 사실이었다. 이를 기이하게 여긴 소성왕은 [[당덕종]]에게 인삼을 [[선물]]했지만 덕종의 반응은 "이거 인삼 아닌데?"라며 인삼을 받지 않았다. 소성왕 2년 5월에는 우두주(오늘날의 [[강원도]] [[춘천시]] 일대) [[도독]]의 보고에 이런 보고가 있다. >기이한 짐승이 있는데, 소 같으면서 몸은 길고 높으며 꼬리 길이가 3척 정도에 털이 없고 코가 길었습니다. 현성천(峴城川)에서 오식양(烏食壤) 방향으로 갔습니다. >ㅡ 《[[삼국사기]]》권 10 신라본기 소성왕 2년 5월 기사 기록을 보면 [[짐승]]의 정체는 [[코끼리]]를 말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코끼리가 왜 신라에 나타났는지는 의문이지만 [[남중국]]이나 [[이슬람]]과의 교역 흔적을 보여주는 기록이라고 해석하는 시각도 있다. 해석대로라면 장사하러 온 외국 [[상인]]이 신라에 데리고 왔다가 놓친 코끼리일 수도 있겠다. == [[삼국사기]] 기록 == 二年春一月 소성왕이 즉위하다 二年春三月 청주 거로현을 국학생의 [[녹읍]]으로 삼다 二年春三月 냉정현령 염철이 흰 [[사슴]]을 바치다 二年夏五月 아버지를 혜충대왕으로 추봉하다 二年夏五月 [[코끼리|기이한 짐승]]이 나타나다 二年秋七月 9척의 [[인삼]]을 당에 진봉하였으나, 당에서 받지 않다 二年秋八月 어머니를 성목태후로 추봉하다 二年秋八月 한산주에서 흰 [[까마귀]]를 바치다 三年春一月 왕후를 봉하고 충분을 시중으로 삼다 三年夏四月 폭풍으로 궁궐이 피해를 입다 三年夏六月 왕자를 [[태자]]로 봉하다 一年夏六月 왕이 [[붕어]]하다 [[분류:신라 국왕]][[분류:불교도 군주]][[분류:800년 사망]]