[include(틀:일본의 역사)] [목차] == 개요 == '''{{{+5 [ruby(蘇我, ruby=そが)]}}}''' 소가(蘇我)는 고대 [[아스카 시대]]의 중심지였던 [[나라현]]에 있던 지명으로, 지금도 나라현에는 소가천(蘇我川)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. 참고로 당대 [[아스카]]에서 소가 바로 북쪽의 명칭은 다름아닌 [[백제]](百濟)였다고 하며, 소가천도 백제천(百濟川)이라고 불렸다. 흔히들 소가하면 이 지역의 호족으로서 해당 지역의 이름을 사용한 소가씨([ruby(蘇我氏, ruby=そがうじ)])를 주로 일컫는다. 당대 토착 호족들은 자신들이 번성한 해당 지명에서 따온 씨氏를 사용했기 때문이다. 소가씨는 [[을사의 변]] 이전까지 [[아스카 시대]] [[야마토]]에서 가장 강대한 권세를 휘둘렀다. == 역사 == 일본 학계에서는 소가 가문의 뿌리를 나라현 일대의 대호족으로 보고 있다.[* 백제계 유래에 대한 논란은 하단 항목 참조.] 이러한 주장은 소가 가문이 6세기 후반 권력을 장악한 이후 [[천황]]의[* 한가지 유의할 점은 천황이라는 호칭은 소가 가문이 몰락한 이후인 7세기 후반 진신의 난을 거치면서 쓰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. 이 당시까지 일본의 군주를 지칭하는 명칭은 오오키미(大君)였다. 다만 이 문서에서는 독자의 이해를 위해 그냥 천황으로 호칭을 통일했다.] 거처가 이곳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근거한다. 궁궐을 한 번 지으면 일반적으로 대대손손 물려주던 한국이나 중국과 달리, [[헤이안 시대|헤이안 시기]] 이전의 일본에서는 제위를 계승할 때마다 황궁을 새로 짓는 것이 일반적인 풍습이었다. 사실 더 정확히 말하면 대대로 새로 짓는게 아니라 아예 2~3년마다 새로 짓고 옮겨다니다시피 했다. 물론 멀리 옮겨간 경우도 있었지만 주로 기존 궁궐의 바로 옆이라든지 근처에 궁전을 새로 짓고 기존 궁궐을 허무는 식이었다. 현대인의 관점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불가사의한 관념이지만 그 자체로 종교적인 의식이었다. 이후 [[오오미]](大臣)[* '''오미'''는 야마토 정권이 세력을 점차 확대해나가는 과정에서 각지의 유력한 부족장들에게 내린 일종의 계급이다. 한국으로 치자면 신라의 [[진골]] 정도와 비교해 볼 수 있겠다. '''오오미'''는 이 오미 가운데서도 가장 유력한 세력에게 주어진 것이었다.] 자리에 올라 라이벌이자 오무라지(大蓮)[* '''무라지''' 역시 오미와 마찬가지로 야마토 정권에 의해 부여된 일종의 계급인데, 오미의 유래가 (원래는 독립적이었던) 각 지방의 유력 부족장들이라면 무라지는 초창기부터 야마토 정권의 실무를 담당하던 관리 출신들이었다. 한국으로 치자면 신라의 [[6두품]] 정도와 비교할 수 있겠다. 다만 진골과 6두품의 차별 대우가 심했던 신라와 달리 오미와 무라지 세력은 6세기 후반 야마토 조정의 양대 축으로서 정국 주도권을 놓고 치열하게 다투었다.] 자리를 역임하던 [[모노노베]] 가문과 정쟁을 벌인 끝에[* 주된 갈등 원인은 바로 [[불교]] 공인 문제. 소가 가문이 불교의 조속한 도입을 주장했던 반면, 모노노베 가문은 기존 토착 종교를 지킬 것을 주장했다. 한번은 흉작이 들자 [[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|이게 다 부처 때문이다]]라면서 모노노베 가문이 사병을 동원해서 소가 가문의 사원을 습격한 일이 있었을 정도(...)] 모노노베 가문에게 승리를 거둔다. 모노노베 가문에게 승리를 거둔 소가 가문은 오무라지의 작위를 폐지함으로써 [[일인지하 만인지상]]의 권세를 휘두른다. 심지어 천황 역시 소가 가문에게 꼼짝 못했는데, 애초에 소가 가문이 황실의 외척이기도 했던 데다가 32대 [[스슌 덴노]]의 경우 소가 가문을 억누르고, 황권을 강화하려다가 소가 가문이 보낸 [[닌자]]에게 [[끔살]](...)[* 소가 가문 입장에서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닌데, 스슌 덴노의 경우 소가 가문이 서포트를 해줘서 황위에 오를 수 있었는데 막상 황위에 올라서 뒤통수를 냅다 후려쳐버리니 열이 받는 상황.] 그렇게 약 반세기가량 일본 최고의 권세가로 군림했던 소가 가문은 645년 [[을사의 변]]을 통해 몰락하고 만다. 다만 [[멸문지화]]에 이를 만큼 몰락한 것은 본가였고, 방계 가문의 경우에는 지방이나 한직으로 좌천당하기는 했어도 그럭저럭 지위를 유지한 것으로 사료에 그려진다. == 개혁파 설 == 사실 흔히들 알려진 것과 달리 소가씨는 오히려 왕실을 적극 비호한 개혁파였다는 추측이 많다. 백제 일변도의 외교에서 수-당, 신라, 고구려와 직접 교역해 외교관계의 다변화를 꾀하고, 외부 문명을 적극적으로 들여왔으며 왕실 직할령인 둔창을 설치하고 확대해, 지방 호족들의 세력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는 데 앞장섰다. 거기다 [[소가노 이루카]] 사후 36대 [[코토쿠 덴노]]가 진행한 나니와 천도도 이미 소가노 이루카의 대에 계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. 일본서기에는 [[소가노 이루카]]가 대악인이라고 나오지만 실제로 [[을사의 변]] 이후 사람들이 38대 [[덴지 덴노]]와 [[나카토미노 카마타리]]를 싫어했다는 정황이 많다. 37대 [[고교쿠 덴노|사이메이 덴노]]가 죽기 전 주변 사람들이 급사했으며, 그녀가 귀신을 보았는데 그 귀신이 소가노 이루카의 귀신이라고 믿었고, 나카토미노 카마타리도 죽기 전에 집에 벼락이 내리치자 소가노 이루카의 원령이 저질렀다고 믿었다고 한다. 마치 [[스가와라노 미치자네]]가 떠오르지 않는가? 이는 사람들이 이들의 죽음을 꼴 좋다고 여겼다는 뜻이며, 소가씨를 지지했다는 뜻이 된다. 소가노 이루카가 죽였다는 야마시로 황자도 존재 자체가 조작된 티가 너무 난다는 평. 오히려 [[을사의 변]]과 [[다이카 개신]]으로 인해 기존의 개혁이 좌절되었고, 덴지 덴노 사후 임신의 난을 거쳐 40대 [[덴무 덴노]]가 즉위하면서 진정한 개혁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. == 정체? == 크게 [[야마타이국]]의 여왕 [[토요]]의 후예라는 설과 [[백제]]-[[마한]]계 [[도래인]]이라는 설이 있다. 참고로 두 지역은 모두 '''[[Cis-AB형]] 혈액형이 관찰되는 지역'''이라는 공통점이 있어 양자 모두 모순 없이 성립이 가능하다. === [[토요]]와의 관계 === 소가씨가 야마타이국의 전설적인 여왕 [[토요]](臺與)와 모종의 연관이 있다는 설이다. 소가씨 계열의 왕족인 [[쇼토쿠 태자]]가 황자 시절 토요토미미 황자(臺聡耳皇子)라고 불렸다는 기록이 있다. 33대 [[스이코 덴노]]의 시호는 '토요미케카시키야히메(豊御食炊屋姫尊)'였으며, 궁궐은 아스카의 토유라노미야(臺浦宮)인데, 이는 '토요의 항구에 있는 궁궐'이라는 뜻으로 [[진구 황후]]의 궁궐과 완전히 같았다.[* [[진구 황후]]의 토요 설과 소가의 조상이자 15대 [[오진 덴노]]의 아버지라는 설이 있는 [[타케우치노 스쿠네]]와의 관계를 생각하면 무시할 수 없는 떡밥이다.] [[스이코 덴노]]의 오라버니인 31대 [[요메이 덴노]]의 시호 '타치바나노토요히노미코(橘豊日尊)'에도 토요(臺)가 들어간다. [[소가노 이루카]]나 [[소가노 에미시]]도 토유라노오미(臺浦大臣)라는 이명을 가지는 등 아스카의 소가 정권과 소가 계열 덴노들은 전부 토요와 연이 있는 사람들이었다. 이 때문에 소가씨가 사실 [[야마타이국]]의 전설적인 여왕인 [[토요]]의 후예[* 꼭 핏줄을 이었다는 뜻만이 아닌 그의 세력이나 의지를 이어받은 것까지 포괄해서 부르는 것이다.]라는 추측이 있다. 소가씨가 임신의 난에서 즉위를 도왔던 40대 [[덴무 덴노]]도 시호 '아마노누나하라오키노마히토노스메라미코토(天渟中原瀛真人天皇)'에 누ヌ=누瓊(구슬 경)=히스이ヒスイ(옥玉, 비취)가 들어 있는데, 본래 소가씨는 신보(神寶)였던 히스이 산업을 독점하던 일족이었다. 또 [[진구 황후]]는 [[조몬 시대]] 이래 신보(神寶)로 내려온 히스이와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었다. 하지만 소가씨가 멸문된 뒤 야요이 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히스이 산업은 사라지고 만다. === [[백제]]-[[마한]]계 [[도래인]]설 === [[파일:2012013044056108.jpg]] 11세기에 편찬된(14세기경에 편찬되었다는 설도 있다.) 역사서 <부상략기>에는 33대 스이코 덴노 시절인 "593년 1월 아스카사 목탑 초석에 사리를 안치하는 행사를 할 때에 소가노 우마코를 필두로 100여 명의 사람들이 모두 백제 옷을 입고 나타나 보는 이들을 즐겁게 해줬다"라는 기록이 나오는데, 이 역시 소가 가문과 백제 사이의 특수한 관계를 보여주는 대목이다. 백제계인 것은 확실치 않지만 친백제 성향이거나 백제와 깊은 연관이 있었음은 확실해 보인다. 한국 사학계에서는 끊임없이 소가 가문이 [[백제]] 출신이라는 주장을 제기하고 있고 한국 사회에서는 소가 가문이 백제 출신인 것처럼 그려지지만, 일본 사학계에서 증거가 없다며 무시하고 있다. 한국 역사학자들이 소가 가문의 뿌리가 백제에 있다고 주장하는 근거로는 크게 세 가지가 있다. * 첫째로 5세기 말의 대신 소가노 마치(蘇我滿知)와 비슷한 시기, 백제의 목만치(木滿致)의 한자가 비슷하다는 점. * 둘째로 소가 가문의 역대 계보를 살펴보면 한자(韓子), 고려(高麗)와 같은 한반도 풍의 이름이 자주 보인다는 것[* 고려하면 보통 한국에서는 [[왕건]]의 [[고려]]만을 생각하는데, 5세기 [[장수왕]] 시기에 고구려도 국명을 [[고려]]로 변경했다.] * 마지막으로 소가 가문이 도저히 그 유래를 추적할 수 없다가 5세기에 갑자기 일본 정계에 갑툭튀했는데 또 교묘하게도 [[대성팔족|백제의 8성 귀족]] 중 하나였던 목(木)씨가 비슷한 시기 소리 소문 없이 백제 중앙 정계에서 사라져버렸다는 점[* = 즉 목씨 가문 전체가 다같이 일본으로 이주한 것 아니냐는 주장이다. 하지만 목윤귀, 목례마나가 6세기에 중, 하 좌평의 자리에 있으므로 이는 사실이 아니다.]이 그것이다. 하지만 반론도 존재하는데 목만치가 일부러 왜국에 가서 나무 '목'과 관련없는 '소가'라는 성씨를 썼다는 점, 백제계라 고려(고구려)와는 빈번한 전투로 반감이 있었을 텐데, 백제계면서 고려라는 이름을 썼다는 점 등이 있다.[* 삼국시대 최후반부의 고구려-백제 vs 신라-당 동맹구도 때문에 착각하기 쉽지만, 고구려와 백제는 수백년을 [[근초고왕|서로]] [[고국원왕|왕을]] [[개로왕|죽고]] [[장수왕|죽이는]] 철천지 원수지간이었고, 백제는 중국(북조, 수, 당)과 협력해 고구려를 견제하려는 시도도 많이 했다. 백제가 당나라에 미련을 끊고 갈라서는 것은 멸망 직전 불과 10여 년 정도뿐이었다. 즉 고구려와 백제가 공통된 조상을 섬기고 있다고 해도 마치 현대의 남북한처럼 극도로 사이가 나빴는데 백제계가 고려라는 이름을 쓰는 것은 부자연스럽다는 것. 그리고 백제 시조 온조가 [[주몽]]의 아들이라는 의식이 있었다지만 백제는 고구려보다는 [[남부여]] 국호와 같이 고구려 이전의 원조 [[부여]]에서 이어지는 정통성을 주로 강조했다.] 또한 '한자'는 소가가 한반도 출신 여성을 납치해 결혼해서 낳은 혼혈이라는 뜻이라고 일본서기에 쓰여있다고 주장한다.[* 목만치는 그 아버지인 목라근자가 가야를 침공할 당시 그곳에서 취한 여자에게서 태어난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를 곡해한 것으로 보인다.] 아니면 목만치가 사실 백제에 파견되어 있던 왜인은 아니었을까?하는 의문이 있지만 목씨는 엄연한 역사를 가진 대성팔족의 명가인데 여기에 파견된 왜인을 넣어줄리 만무하며, 무엇보다 목만치에겐 목라근자라는 분명한 생물학적 아버지가 그 출생과정과 함께 일본서기의 기록으로 존재한다. 하지만 [[소가노 이루카]]의 별칭으로 제시되는 林大臣, 我入鹿, 鞍作大郎 등을 인용했을 때, 鞍作은 <扶桑略記>에 의하면 백제계 도래인으로 명시되어 있어, 그의 출자에 대한 논란은 아직도 말이 많다. 언급되었던 林大臣 또한 <신찬성씨록>에 의하면 > <新撰姓氏錄> 左京諸蕃百濟林連百濟國人木貴公之後也 >임씨는 백제국 목씨에서 나온 가문이다. 라고 적혀있다. 일본 사학계에서는 백제계로 [[나카토미노 카마타리]]가 더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중이다. 다만 후지와라 씨족의 시조인 [[후지와라노 후히토]]는 38대 [[덴지 덴노]]의 사생아라는 게 정설. 좀 더 최근의 조사에 따르면 <상궁성덕법왕제설>에 소가씨가 원래 임(林)씨라고 표기한 기록이 있으며, 또 다른 서적인 <신찬성씨록>의 경우 임(林)씨는 본래 백제 사람 목(木)씨였다는 기록이 존재한다. 위의 막연한 근거들 보다는 좀 더 확실하다고 할 수 있다. 한편 목씨가 전부 건너가서 소가씨를 만들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는 게, <상궁성덕법왕제설>의 임씨였다는 점을 미루어 백제권에 속했던 영토에 본관을 둔 임씨들을 조사할 시 종가가 소유한 정자 아래서 마한 유력자의 유물이 출토되는걸 볼 수 있다. 적어도 이들은 전부 건너가지는 않았으며 현지에서 목씨만이 아닌 다른 성씨들까지 통합하여 소가씨로 만들었을 것이다. ==== 알렉산더 보빈의 가설 ==== 미국의 언어학자 [[알렉산더 보빈]]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, '소가'는 애초에 고대 한국어, 정확하게는 '''[[신라]]'''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. '소'는 '쇠'의 고대형인 '*sori'와 연관이 있으며, 이는 다시 신라의 성씨 '[[김(성씨)|김]]'과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.[* 다시 말해서, 당시 신라에서는 '金'을 [[훈독]]해 '*소리'라고 불렀다는 것이다.] '가'는 왕을 뜻하는 '*[[간(군주)|kan]]'과 연관이 있다고 봤다. 즉, '소가'는 직역하면 '김씨 왕'이 된다는 것이다. 즉 도리어 신라 출신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.[* 만약 그렇다면 윗 문단의 개혁적인 행보와도 관련이 있게 된다.] --[[흉노족 신라왕족설|소가씨 신라왕족설]]-- 자세한 내용은 [[https://homaranisto.tistory.com/38?category=772561|이곳]]을 참조. 참고로, 해당 논문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, 보빈은 [[오진 덴노]]와 [[진구 황후]] 역시 고대 한국어를 쓰던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보았다. 다만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은 소가나 오진, 진구 등이 한국어족 화자라고 가정해도 자신들의 정체성이 한국이 아니었기 때문에 한국인이라고 볼 수는 없다.[* 사실 과거의 국가별 정체성을 근대적 민족 개념에 무리하게 주입할 수는 없다.] == 가계 == ||<-3><#FFC0CB> [[목라근자|이시카와스쿠네]] || ||<-3><#FFC0CB> [[목만치|마치]] || ||<-3><#FFC0CB> [[목간나|카라코]] || ||<-3><#FFC0CB> 코마 || ||<-3><#FFC0CB> 이나메 || ||<-3><#FFC0CB> [[소가노 우마코|우마코]] || ||<#FFC0CB> [[소가노 에미시|에미시]] ||<-2><#FFC0CB> 쿠라마로 || ||<#FFC0CB> [[소가노 이루카|이루카]] ||<#FFC0CB> 이시카와마로 ||<#FFC0CB> 아카에 || == 관련 문서 == * [[스슌 덴노]] * [[스이코 덴노]] * [[다이카 개신]] [[분류:일본의 귀족 가문]]