[include(틀:신라 추존 국왕)] ||<-2><#4A2D5B> '''{{{#FFD700 {{{+1 太祖 星漢王[br]태조 성한왕}}}}}}''' || ||<tablealign=right><tablebordercolor=white><#4A2D5B><:> '''{{{#FFD700 묘호}}}''' ||||<(><white> '''[[태조]](太祖)''' || ||<#4A2D5B><:> '''{{{#FFD700 시호}}}''' ||||<(><white> 성한왕(星漢王) || ||<#4A2D5B><:> '''{{{#FFD700 별호}}}''' ||||<(><white> 한왕(漢王) / 태조대왕(太祖大王) / 시조대왕(始祖大王) || ||<#4A2D5B><:> '''{{{#FFD700 성씨}}}''' ||||<(><white> 김(金)[* [[석탈해]]로 보는 시각도 있다. 이에 대해선 후술] || ||<#4A2D5B><:> '''{{{#FFD700 휘}}}''' ||||<(><white> 성한(星漢/聖韓) / 세한(勢漢)[* 김씨의 시조라는 내용에서 [[김알지]]의 아들인 세한(勢漢) 혹은 열한(熱漢)으로 보기도 한다. 김씨로써는 처음으로 왕위에 오른 [[미추왕]]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.] / --열한(熱漢)--[* 열(熱)은 세(勢)의 오기로 추정.] || ||<#4A2D5B> '''{{{#FFD700 부왕}}}''' ||||<(><white> [[김알지|세조]](世祖) || ||<#4A2D5B><:> '''{{{#FFD700 생몰연도}}}''' ||||<(><white> ? ~ ? || [목차] [clearfix] == 개요 == [[신라]]의 [[인물]]. 묘호는 태조(太祖)이며 편의상 [[추존]]왕으로 분류되어 있지만 추존되었다는 기록도 없어서 추존왕인지도 불분명하다. 서사에는 단순히 태조라고만 딱 한번 등장한다. == 그는 누구인가? == [[역사책]]에는 이름이 등장하지 않고, 오직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『[[문무왕릉비]]』,『[[흥덕왕]]릉비편』, 『[[김인문(신라)|김인문]][* [[문무왕]]의 동생.]묘비』, 『진철대사탑비문(眞澈大師塔碑文)』, 『진공대사탑비문(眞空大師塔碑文)』등 '''[[금석문|비석]]에서만 등장하는 정체불명의 인물'''.[* 사실 진철대사탑비와 진공대사탑비는 [[경순왕]]이 [[왕건]]에게 나라를 바친 937년, 939년 건립됐지만 거의 멸망 직후의 일이라 신라인의 정체성으로 작성된 문장이나 다름없다.] 금석문에 따르면 [[문무왕]]은 그의 15세손이며 [[흥덕왕]]은 24대손이라고 한다. 한국에 현존하는 사서는 모두 신라가 멸망한 뒤 [[고려]]시대 이후에 옛 기록을 모아서 편찬된 것이다. 당대의 금석문에 기록된 내용으로 볼 때, 적어도 '''신라인들이 [[태조]]라고 여기는 어떤 국왕이 있었다는 점은 분명하다'''. [[삼국사기]] 신문왕조, [[진흥왕 순수비]]에도 태조의 이름이 나오지는 않지만 신라에 '''태조'''라는 [[묘호]]로 불리는 왕(혹은 추존왕)이 있었다는 것 자체는 단편적으로 나온다. 다만 초기 신라는 중국의 [[한문]]이 제대로 들어와 있지 않았고, [[묘호]] 같은 중국발 제도도 없었으므로, 성한왕이라는 국왕이 살았고 죽었던 직후 시대부터 태조로 불렸다기보다는 먼 훗날인 신라 중기 이후에 [[추존]]된 묘호일 가능성이 크나, 정확히 어떤 인물이 태조인지는 논란이 있다. 이외에 성한왕(星漢王)이 김알지(金閼智)의 다른 표기라는 주장도 있다. 성(星)="쇠"=김(金), 한(漢)=크다=알(閼), 그리고 왕(王)과 지(智)는 공통적으로 존칭접사를 뜻하기 때문. 그러나 문무왕릉비편에 나오는 [[문무왕]]의 15대조가 [[삼국사기]] 기준 김세한으로 나와서 이것도 확실하지는 않다. ||<tablealign=center>[[파일:attachment/greatkingheongdukbi123.png|width=500]]|| ||『흥덕왕릉비편』에 등장하는 성한왕.|| 《[[삼국사기]]》나 《[[삼국유사]]》와 같은 역사서에는 신라의 '태조'에 해당하는 인물이 구체적으로 등장하지 않는다. 삼국사기 [[신문왕]]대 5묘(신라판 [[종묘]]) 관련 기사에서 신라 태조대왕(太祖大王)이 언급되긴 하지만, 누가 태조인지 부연 설명은 없다. >대신을 보내 조상묘에 제사를 올렸다. 제문에 아뢰었다. >“왕 아무개는 머리를 조아리고 재배(再拜)하며 삼가 '''태조대왕(太祖大王)'''ㆍ[[진지왕|진지대왕(眞智大王)]]ㆍ[[김용춘|문흥대왕(文興大王)]]ㆍ[[태종 무열왕|태종대왕(太宗大王)]]ㆍ[[문무왕|문무대왕(文武大王)]] 영전에 아룁니다. 저는 재주와 덕이 없이 숭고한 유업을 이었기에, 자나 깨나 걱정하고 애쓰느라 편안하게 지낼 겨를이 없었습니다. > >{{{#!wiki style="text-align:right" [[http://terms.naver.com/entry.nhn?docId=1642700&cid=49615&categoryId=49615&expCategoryId=49615|《삼국사기》 권제8 신라본기 제8, 신문왕 7년(687) 4월]]}}} == 추정 == 신라 당대에 세워진 [[금석문]]에서는 신라의 시조라고 주장하는 [[김일제]](金日磾)[* [[한나라]]의 투후(秺侯)로, 흉노족 왕자 출신의 한나라 귀족이다. 신라의 금석문 등에는 김일제가 신라의 시조라고 표시되어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와 관련된 이야기는 [[흉노족 신라왕족설]] 참조.]와 함께 등장한다. ||<tablealign=center>[[파일:attachment/greatkingmunmubi234.png|width=500]]|| ||『문무대왕비문』에 등장하는 성한왕.|| >秺侯祭天之胤, 傳七葉以▨▨焉. 十五代祖星漢王 降質圓穹 誕靈仙岳 肇臨▨▨ 以對玉欄 始蔭祥林 如觀石紐 坐金輿而(…). >투후(秺侯) 제천(祭天)의 후손으로 7대를 전하여 ▨▨하였다. '''15대조 성한왕은 그 바탕이 하늘에서 내리고''' 그 영(靈)이 선악(仙岳)에서 나와 ▨▨을 개창하여 옥란(玉欄)을 대하니, 비로소 조상의 복이 상서로운 수풀[祥林]처럼 많아 석뉴(石紐)[* [[하나라]]의 [[우왕]]이 태어난 곳이나 이 비석에서 사용된 의미는 불명.]를 보고 금가마[金輿]에 앉아 … 하는 것 같았다. > >{{{#!wiki style="text-align:right" 『[[문무왕릉비]]』[[http://db.history.go.kr/item/level.do?sort=levelId&dir=ASC&start=1&limit=50&page=1&pre_page=1&setId=5&prevPage=0&prevLimit=&itemId=gskh&types=&synonym=off&chinessChar=on&brokerPagingInfo=&levelId=gskh_005_0010_0020_0110&position=0|해석문 중]]}}} ---- >'''태조(太祖) 한왕(漢王)'''은 천년의 ▨을 열고, ▨성(▨聖)은 백곡(百谷)의 ▨에 임하셨다. > >{{{#!wiki style="text-align:right" 『[[김인문(신라)|김인문]]묘비』}}} 이에 근거해 2008년 KBS1에서 방송된 역사산책에서 [[김일제]]가 신라의 알려지지 않은 진짜 시조이며, [[흉노]]가 신라 왕실의 근본이 된다는 주장을 펼쳤으나 현재 학계에선 인정하지 않는다. 자세한 내용은 [[흉노족 신라왕족설]] 참조. 현재는 '''[[김알지]]=성한왕이라고 보는 설'''과, '''[[삼국사기]]에서는 김세한(勢漢), [[삼국유사]]에서는 김열한(熱漢)으로 나오는, 김알지의 아들로 추정하기도 한다.''' 이런 주장은 성한(星漢)과 세한(勢漢)의 고대 신라어 발음이 비슷하였을 것이라는 가설에 근거한 것이나 현재로는 당시의 정확한 발음이 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가설 수준에서 머물고 있다. 이 가설로 추측해 보면 문무왕비에 기록된 성한왕 설화가 [[김알지]]의 설화와 너무나 유사[* 경주 선악산에 내려온 성한왕이 옥으로 된 우리(가축을 가두는 장소)에 있는 것을 보았는데 상서로운 수풀에 앉은채 석뉴를 보고 금가마에 앉아 있는 것 같다고 나와 있다. 세부적으로 보면 [[김알지]]의 경우 난생설화에 가깝고 [[성한왕]]은 천손강림설화에 가깝지만. [[김알지]]의 경우 토템이 말이 아니라 닭이고, 태어난 곳이 알이 아니라 금궤짝인 것을 빼면 [[박혁거세]] 탄생 설화와 완전히 똑같아서 훗날 [[박혁거세]] 설화와 [[성한왕]] 설화가 부분적으로 섞여서 [[김알지]] 설화가 만들어진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있다.][* 신라의 박씨, 석씨는 모두 알에서 태어났고 '''김씨는 금궤(金樻)에 들어가 하늘에서 내려왔다거나 혹은 금수레를 탔다고도 한다.''' 이는 너무 괴이해서 믿을 수 없으나, 세속에서는 서로 전하며 이것이 사실이라고 한다.(新羅朴氏·昔氏皆自卵生 金氏從天入金樻而降 或云乗金車 此尤詭怪 不可信 然世俗相傳 爲之實事) - 『[[삼국사기]]』신라본기 [[경순왕]].] 하기 때문에 1대손인 김세한이 실제 경주김씨 왕가의 시조이고, 김알지는 김씨의 권위를 위해 신화를 덧붙인 전설적인 인물로 후대에 추숭되어 김세한 앞에 배치되었을 가능성도 존재하게 된다. 이 때 김'일제'가 김'알지'라는 이름의 어원적 배경이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. 그 외에 김알지의 6세손이자 김씨로는 최초로 왕위에 오른 '''[[미추왕]]이 신라 태조라는 주장이 있다.''' 하지만 [[석탈해]]를 지칭하는 말이라는게 외국 학자들의 주장이다.[* 별도의 주장이지만 [[경북대학교]] 문경현 교수도 흉노의 태자인 김알지로부터 역사가 시작한다는 논지로 신라 박씨 왕은 없었다고 보고 있다. 내물계와 무열계 간의 역습만이 있었다고 이해하면 빠르다. 역시 별도로 부산외대 권덕영 교수는 신라 하대의 신덕/경명/경애왕의 박씨 계승이 후대에 조작된 것이라는 견해를 갖고 있다.] 이외에도 [[수로왕]]과 동일인물로 비정하는 경우도 있다. 문무왕의 어머니 [[문명왕후]]는 [[금관가야]]계 [[김해 김씨]]로 [[김유신]]의 여동생이며, 실제로 문무왕 본인도 왕에 오른 뒤 외가의 시조 [[수로왕릉]]의 정비를 신경쓴 기록이 있다. [[문무왕]]이 [[수로왕]]을 자신의 15대 조상으로 언급했고 [[김인문]]은 [[문무왕]]의 형제이기 때문. [[분류:신라의 추존 왕]]